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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조선 지배 전략 세 가지

by 소정 Sep 24. 2021
 이 글은 <표류사회: 한국의 여성 인식사>라는 책자로 곧 출간될 예정입니다.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에서 창작지원작에 선정되었고, 여러분들의 도움으로 텀블벅 펀딩도 300%를 달성하며 성공리에 막을 내렸습니다. 일제 식민사관과 산업화시대의 폐단으로 왜곡된 현재의 전통문화/가족문화의 원형을 밝히고, 당당하고 주체적으로 살아갔던 한국 역사 속 여성문화와 양성조화의 문화를 밝히는 데 앞장서는 책이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책에는 이보다 더 알차고 많은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① 조선의 역사와 철학을 왜곡하라―식민 사관의 주입     


일제는 조선의 인적·물적 자원을 빠짐없이 활용하기 위해 다양한 분야를 치밀하게 조사하고 바꿔 나갔다. 우선, 1906년부터 1938년까지 조선 각지의 지리·관습·풍속을 체계적으로 조사했다. 그리고 조선뿐 아니라 중국, 만주, 연해주까지 샅샅이 뒤져 약 20만 권의 조선 사서를 강탈해 불태우거나 불법 반출해 갔다. 이로 인해 조선의 상고사는 거의 완벽하게 지워져 갔다. 저항을 잠재우고 식민 통치를 더 쉽게 하려면 민족 정체성부터 지워야 했기 때문이다. 이후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1925년) 한국 고대사를 왜곡한 『조선사』 37권을 간행하고 본격적인 식민 사관 교육을 시작했다.      

대표적 역사학자인 이마니시 류[今西龍, 1875~1932]와 오다 쇼고[小田省吾, 1871~1953] 교수는 경성제국대학(서울대의 전신)에서 한반도는 늘 정체된 성향을 가졌으며, 타율적이고 외세 의존적이었다는 반도사관을 만들어 가르쳤다. 고조선사를 신화로 왜곡하고, 삼국의 역사를 일본의 속국이었던 작은 부족의 역사로 전락시켰다. 왜곡한 것은 역사뿐만이 아니었다. 정신세계와 가치관을 이루는 철학과 사상도 조작했다. 대표적 철학자인 다카하시 도루[高橋亨, 1878~1967]는 조선 사상은 중국의 아류일 뿐이며 이분법적 주리(主理)·주기(主氣)론에 빠져 형식과 명분 싸움으로 당쟁만 일삼았다는 논리를 정립했다. 이러한 관점에서 지금까지도 우리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렇게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많은 학자들이 양성되었음에도 우리의 식민 사관 탈출은 아직도 요원해 보인다.


 다카하시는 조선사회의 특징을 이렇게 정리했다. ①사상의 고착성(한 번 믿으면 변하지 않고 꽉 막혀서 고집불통이 됨), ②사상의 무창견(조선은 중국 사상의 아류로서, 독자적으로 창조한 게 없다), ③창기(낙천적 평정 유지), ④문약함(책상에서 이론만 파는 무능함), ⑤당파심(당쟁하다 망했다), ⑥형식주의(실질보다 형식 중시). 더불어 조선 사상계를 퇴계와 율곡의 주리(主理) 및 주기(主氣)로 단순 이분화하였다.(�조선의 이언집부물어�(1914) 서문의 내용을 이형성이 정리한 내용을 재인용: 이형성(2011), p.33. 


해방 후, ‘배운 인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가운데 경성제대(이후 미군정에 의해 폐쇄되어 서울대로 통합되었음) 출신들은 전국 대학의 교수, 정치인, 고위 관료 등이 되어 각계를 이끌고 후진을 양성했다. 바쁘게 진행된 현대사 속에서 식민 사학은 재고와 청산의 겨를 없이 계승되고 굳건한 뿌리가 되어갔다. 식민 사학을 극복해 보려는 다양한 노력은 오히려 비주류가 되어 정계와 학계에서 이단으로 치부되었다. 지금까지도 우리 교과서 일면에는 이마니시 류와 다카하시 도루의 사고가 면면히 깔려 있다. 아직도 우리는 일제가 남긴 안경을 쓰고 식민 사관을 머릿속에 담은 채 세상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② 조선의 관혼상제 풍속을 일본식으로 바꾸기


사상은 제도를 만들고, 제도는 문화를 만든다. 문화는 사람들의 가치관을 만들고, 생각을 만들며, 거기서 다시 새로운 사상이 싹튼다. 사상은 그렇게 반복 순환하며 현실을 만들어 간다. 일제의 제국주의·국수주의 천황 신앙은 식민 사학으로 조선의 사상을 뜯어고치고, 메이지 민법으로 조선의 제도를 바꾸어 마침내 ‘조선의 현실’을 바꿔 갔다. 

 가장 기본적인 관혼상제만 해도 그렇다. 중일전쟁을 앞둔 일제는 〈의례준칙〉을 반포(1934년)하여 관혼상제를 전시체제와 식민 정신에 걸맞게 바꾸었다. 조선인들이 특히 중요시했던 이별 의식인 장례(葬禮)는 병참기지국인 식민지의 처지에 걸맞게 ‘효율적인 시신 수습 의식’으로 전락시켰다. 

 본래 우리 문화의 전통 장례는 상을 치르는 기간이 자유로웠다. 각 집안의 상황에 맞게끔 융통성이 있아ᅠ갔던 것이다. 먼 곳에 사는 친인척과 집안마다 다른 경제 상황들을 배려하기 위한 조치였다. 때문에 상황에 따라 3일장, 5일장, 7일장 등을 선택할 수 있었다. 수의 역시 생전에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입었던 옷이나 고인이 중요하게 여겼던 의복을 사용했다. 그래서 왕은 정사를 볼 때 입었던 곤룡포를, 관료는 관복을, 선비는 유학자의 옷인 심의(深衣)를, 여성은 혼인 시 입었던 활옷을, 아이들은 부모가 선물한 가장 좋은 옷 등이 수의가 되었다. 생전에 가장 영예롭고 의미가 담긴 순간을 고인에게 입혀 보내기 위함이었다. 문상을 받는 빈소에는 친인척과 지인들이 고인에게 보내는 마지막 선물(폐백)이나 고인의 삶과 업적을 추억하는 글, 고인을 보내며 해 주고 싶은 말들을 적은 ‘만시’(輓詩) 등을 올렸다. 오늘날 추모 광장이 열리면 사람들이 포스트잇이나 메모지에 짧은 글을 써 붙이며 추모하는 모습과 비슷하다. 또한 남은 가족이 이별을 인정하고 치유할 시간을 주기 위해 삼년상(실제로는 만 2년이다) 등 애도 기간을 길게 잡았다.

하지만 일제는 조선인들을 빨리 일터로 보내기 위해 장례 기일을 3일 내에 끝내도록 정하고, 옷의 낭비를 막기 위해 죄수복으로나 사용되던 가장 값싼 삼베로 수의를 만들게 했다. 또한 일본이 의례 시 사용하던 검은색 양장에 상장(喪章) 리본과 군대식 완장을 두르고 천황의 상징인 국화를 바치는 장례 의식을 보급하며 화장과 공동묘지 문화를 도입했다.         

 

브런치 글 이미지 1


③ 조선의 가족문화를 일본식으로 바꾸기―호주제 도입     


 또한 사회의 가장 기본 단위인 가족문화에 메이지 민법의 호주제를 도입(1921년, 「조선호적령」)하여 인적 자원의 파악과 통제를 쉽게 했다. 호주제란 남성 가장인 호주(戶主)가 집안의 모든 권한을 독점하고, 호주의 부계 친속들을 호주를 통해 일괄 관리하는 제도이다. 고려와 조선 시대의 호적은 함께 사는 동거인들을 표시하고 그 대표자를 호주로 내세웠다. 때문에 함께 살지 않는 가족들까지 파악하기는 힘들었고, 여자가 호주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일제는 가솔들의 정보 파악을 수월하게 하기 위해 ‘호적부’라는 것을 도입했다. 호주제를 통해 부계 친속들이 각자 떨어져 살더라도 그들의 개인 정보를 호주 밑에 모아 놓았기에 쉽게 파악할 수 있었다. 예를 들자면, 우리나라도 호주제가 시행되던 2007년까지 호적등본 한 장만 떼어 보면 호주와 가족 전체의 모든 정보를 파악할 수 있었다. 심지어는 이혼, 입양, 수감 이력 등도 상세히 알 수 있었다. 

그래서 호적을 떼면 당사자보다 호주의 내용이 더 크게 나왔고 집안의 이력과 동향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특히 며느리는 시아버지의 호적에 들어가 시댁 식구의 모든 정보와 함께했다. 또 호주가 구성원들에 관한 재산권·혼인권·거주권 등의 중요 권한을 독점하기에 명령 수행과 통제가 용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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