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골에 살면서 도시에 대한 갈망이 더 커졌다.
나는 내가 그 어디에서든 금방 적응하고 잘 살아가는 사람이라 생각했다. 지루하고 똑같은 풍경보단 새로운 장소와 분위기에 호기심이 많은 나는 시골에 와서도 잘 살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사를 온 후 왠지 모르게 이 집이 내 집 같지가 않고 곧 떠나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그 때문일까. 처음 이사 왔을 때 곧 떠날 집이라며 가구며 집안에 필요한 것들을 대충 준비했다. 엄마는 “넌 새 집이 생겼는데 막 꾸미고 싶고 설레지 않니? 왜 이렇게 대충 해?”라고 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커튼도 대충 달아서 지금 봐도 뭔가 좀 어설프다. 특히 안방 커튼은 길이가 맞지 않아 발목이 나온 바지 입은 아이처럼 댕강 올라가 있다. 창문은 블라인드를 맞추어 달기 싫어서 대충 천으로 달아 놓았다. 어차피 금방 떠날 집인데 창문 길이까지 재며 블라인드를 달아서 뭐 하나 싶었다. 그렇게 나는 이 집주인이지만 곧 떠날 손님처럼 새 집을 맞이했다.
그렇게 1년이 지났다.
여전히 나는 내 집과 친하지 않다. 편하지만 마냥 편치 않은 그런 집. 동네도 아직 익숙지 않다. 시내에 있는 미용실이 못 미더워 원래 다니던 도시의 미용실로 멀리 다닌다. 병원도 예외가 아니다. 피부과를 가는 날이면 나는 다시 이 도시에 못 올 사람처럼 피부과 주변을 어슬렁거리며 ‘귀하게’ 구경한다. 화려한 쇼핑몰, 다양한 음식점, 카페들…. 예전에 살 때는 너무나 익숙한 풍경이었는데 이젠 멀리 있다 생각하니 더 새롭게 보인다. 그때, 문득 생각이 들었다.
어라…? 여기에 살 때 내가 이렇게 설렜었나? 그때도 항상 현실에 만족하지 못했었던 것 같은데. 오히려 복잡한 여길 뜨고 싶어 했어.
조용한 뉴질랜드와 같은 곳을 꿈꾸면서 말이야.
사람이 많고 화려한 도시 속에서 나는 사람이 많이 없고 한적한 뉴질랜드에서의 삶을 꿈꾸곤 했다. 그 도시 속에서 내 삶을 꾸려 나갈 때 나는 그곳을 귀하게 여긴 적이 없었다. 도시 속 잘 가꾸어진 산책로에서 러닝을 하면서 나는 늘 공허했다.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 맞을까 하고. 다른 어딘가 내가 더 만족하는 곳이 있지 않을까 하며 그곳을 또 떠날 준비를 했었다.
생각이 이렇게 다다랐을 때 깨달았다. 모든 것은 내가 결정한 것이었단 걸. 내가 머물고 있는 이곳이 항상 별로였던 건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만들어 낸 생각이었단 걸. 문득 뉴질랜드에서 홈스테이를 했을 때, ‘여기 참 좋긴 한데 왜 이렇게 심심하지?’ 하며 공허함을 느꼈던 순간이 떠올랐다. 새로운 공간으로 여행을 갔을 때도 문득 ‘이 공간에 익숙해져서 공허함이 생기면 어떡하지?’ 하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나를 공허하게 했던 그 도시가 지금의 나에겐 귀하게 구경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고 그토록 갈망한 한적한 시골집을 지금의 나는 빨리 뜨고 싶어 한다. 정말 고약한 청개구리 심보가 아닐 수 없다.
모든 일을 무엇이라고 정확히 답을 내릴 수 없다. 어떤 이에게는 도시가, 어떤 이에게는 시골이 잘 맞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면 또 뒤바뀔 수도 있다. 그러므로 나처럼 종잡을 수 없는 심보는 귀를 두껍게 만들어야 할 필요가 있다. 열린 마음으로 귀를 열되, 나 자신의 생각이나 느낌, 취향을 지키며 남의 말과 시선을 의식하란 뜻이다. 다수가 말하는 것이 정답인 양 나와는 반대되는 상황을 더 좋게 보고 탐내는 심보. 이것을 인지하고 행복의 역치를 낮춘다면 나는 어디서든 자유로운 사람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한 것만큼 집값이 안오르면 어떠랴. 이미 물은 엎질러졌고 나는 여기서 2년을 더 살아야 하며 계속 실망하며 살아봐야 득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집을 교훈삼아 정신차리면 될 일이다.
이런 생각에 다다르자
지독하게도 떠나고 싶었던 나의 시골집이
갑자기 한껏 포근해졌다.
1년 만에 창문이 내 눈에 보인다. 예쁜 블라인드를 달아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