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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또 다른 본성, 샤덴프로이데

행복 탐구서

by 까칠한 펜촉

넷플릭스에서 시즌을 거듭하며 새로운 재미를 더 해 준 미드 <기묘한 이야기>에는 핵심적인 개념이자 주요 배경으로 ‘뒤집힌 곳(The Upside Down)’이라는 가상의 공간이 존재한다. 드라마에서는 일반 사람들은 지각하지 못하는 세상이지만, 엄연히 실제 하는 곳으로 그려진다.


뒤집힌 곳(The Upside Down)은 현실 세계와 평행하게 존재하는 어둡고 기괴한 차원으로 현실과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황폐하고 온통 어둠과 기괴한 생명체로 가득한 공간이다. 또한, 뒤집힌 곳은 과학과 초자연적 현상의 경계, 두려움과 트라우마의 메타포로도 표현되어 등장인물들의 희생과 성장에 트리거가 되기도 한다.




행복 탐구를 하면서, 흥미를 잃어갈 즈음 매우 충격적이고 신선한 단어를 접하게 됐다 바로, 이 글의 주제인 행복의 또 다른 본성,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이다.


나는 지금까지 행복을 3가지 유형으로 정의하고 이에 대한 심화 탐구를 하고 있었다. 그 3가지 유형의 핵심이자 전제는 ‘Well(잘, 만족할 만큼, 올바르게, 훌륭하게, 친절하게)’이란 단어로 표현되는 온통 긍정적인 상태와 태도, 자세, 습관, 상황 등이었다.


내가 정의하는 행복의 3가지 유형은 아래와 같다.


Well-Doing: ‘가치관, 태도, 자세, 습관, 정서, 감정’ 등을 Well의 상태로 하여 ‘기쁨, 희열, 쾌락, 즐거움 등’의 긍정적인 피드백을 자주, 빈번히 받을 수 있도록 함

Well-Being: 일상의 기본 요소(혹은 기본기)라 할 수 있는 ‘일, 사랑, 건강, 헌신과 봉사’ 등을 Well의 상태로 하여 ‘안정성, 안전성, 만족감’ 등으로 표현되는 삶의 긍정적인 상태를 유지하는 것

Well-Done: 심리학에서 언급하는 ‘Eudaimonia(자아 성취), Summum Bonum(최고의 선)’의 상태. 각 개인이 삶의 주체자로서 각자 삶의 핵심가치(카타르시스, 사회적 지위, 평판, 경제적 수준, 명성, 명예)를 달성하는 것


행복은 대부분 이 범주 안에 들어있고, 이 세 가지 유형의 근본은 모두 주체가 ‘나(ME)’로 설정되어 있다. 그리고, 행복 연구자들이 공통적으로 언급한 것 중 하나는 ‘타인(他人)’을 비교, 평가, 경쟁의 상대로 지나치게 신경 쓸 경우, 행복이란 주관적 정서에 해(害)가 된다고 했기에, 내 행복감에 영향을 주는 Well의 주체자는 오로지 ‘나(ME)’ 뿐이라는 생각을 했던 터다.


그런데,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라니?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는 ‘Schaden(손해, 피해) + Freude(기쁨)’의 조합으로 이루어진 단어로서 타인의 불행에서 느끼는 즐거움을 뜻하는 독일어이다. 인간 본성의 일부로 심리학적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주로 질투, 경쟁심, 우월감과 관련이 있다고 한다. 자신이 불행하다고 느낄 때, 상대적으로 타인의 실패를 보며 안도감을 느끼는 현상이 발생하기도 하고 유명인의 몰락, 경쟁자의 실패, 나를 무시하던 사람의 좌절 등을 보며 무의식적으로 안도감과 행복감을 느끼는 것이라고 한다.


사악하고 노골적이지만, 부인하기 어려운 진실을 마주한 느낌이다.


막장드라마를 보고 통쾌해하고, 바보스럽고 우스꽝스러운 개그맨들의 연기를 보며 흘리는 비웃음. 그리고, 어려움에 처한 친구의 어깨를 두드리며 느꼈던 상대적 우월감. 퇴사한 회사의 주가가 떨어질 때 느끼는 고소함. 절친의 성적 하락, 옆 가게의 폐업, 금수저 친구의 사업 실패, 평소 싫어했던 사람이 중병에 걸렸다는 소식, 문제아가 되었다는 친구 자녀들 얘기, 코인투자 실패로 전 재산을 잃었다는 이야기…


정말 통쾌하고, 고소하다. 행복감이 급상승한다.
이게 사실이다. 한 톨의 거짓이 없다.


이것이 바로 행복의 뒤집힌 곳(The Upside Down),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의 진실이다.

샤덴프로이데를 인정하니, ‘행복의 근본은 Well’이라고 생각했던 견해에 의심이 든다.

과연 행복에는 소위 선(善)하고 긍정적인 것만 있을까? 혹은 악(惡)하고 부정적인 것을 없을까?


이 답은 행복(幸福)이란 한자어에 있다.


한자, 幸(행)은 十(열 십), 辛(매울 신)의 조합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때 十(열 십)은 '가득 찬 만수(滿數)'를 의미하고, 辛(매울 신)은 의미 그대로 '험난하고 어려운 고난(苦難)'을 의미한다. 소위, "내가 인생의 단맛, 쓴맛을 다 봤다."라고 할 때 쓰는 한자어가 이 幸(행)이란 말이다. 따라서, 이 幸(행)의 함의는 '삶의 어려움과 도전을 포함'하고 있다고들 한다.


행복(幸福)에서 福(복)은 示(보일 시), 畗(복 복)의 조합으로 구성되는데, 이때 示(보일 시)는 '하늘이 사람에게 내려서 나타낸다는 신의(神意)를 상징하고, 畗(복 복)은 복부가 불러 오른 단지의 모양을 나타냄으로써 '하늘이 내린 풍요로움과 넉넉함을 의미'한다고 한다.


따라서, '행복(幸福)은 살다 보면 우연히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삶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도전하여 얻는 것이기에 행복이란 본질에서는 남의 불행을 통해 얻는 것은 행복이라 볼 수 없다는 견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남의 불행으로 얻는 그 감정이 우리가 일상에서 얻는 쾌감, 희열, 기쁨, 즐거움과 유사한 면이 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을 듯하다.




남의 불행을 보고 행복감을 느끼는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만 있는 것은 아니다.


타인의 행복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프레우덴프로이데(Freudenfreude)도 있다.

프레우덴프로이데(Freudenfreude)는 타인의 행복을 보고 느끼는 기쁨을 의미하며 연구에 따르면, 타인의 성공을 함께 기뻐하는 사람일수록 정신적 안정과 행복도가 높다고 한다.


샤덴프로이데(Schadenfreude), 프레우덴프로이데(Freudenfreude)를 보며, 행복이란 것에는 오로지 나(ME)와 Well만 존재하지 않음을 새롭게 탐구할 수 있었다.


동시에 행복에 대한 존재론과 목적론에 대한 생각도 해 보았다.

우리 삶에 행복은 궁극적인 목적일까?
혹은 우리 존재의 번영을 위해 행복은 수단과 도구일 뿐일까?

만약, 수단과 도구라면 이것의 가장 올바른 활용방법은 무엇일까?
마지막으로 현대의 기술이나 문화, 사회적 풍토에 그에 어떤 영향을 줄 수 있을까?


꼬리에 꼬리를 문다.


나에게 행복은 지네가 되는 것인데… 그게 어렵네..



- 까칠한 펜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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