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대 단상
엠파스와 함께한 3년 8개월의 시간들은 영원히 잊을 수 없다.
몇몇 순간들은 사진으로 찍은 듯 또렷하게 남아있다. 어떻게 잊겠는가. 그 수많은 날들을.
30대 초반의 젊은 열정과 패기는 늘 높은 이상과 꿈을 갈구했고, 누가 가르치고 제시하지 않아도 내 삶의 목표와 방향성을 뚜렷이 하여 달려갔고 원하는 것들을 늘 쟁취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사랑하는 아내를 만나 수많은 동료들의 축하와 환호 속에 결혼을 했다. 그 당시 쟁취한 대부분은 것은 세월 속에 퇴색되고 의미를 상실했지만, 아내와의 사랑의 결실은 지금도 성장하고 있다.
생기 있고 투쟁심 넘치는 모습은 내 매력 포인트였다.
그런 모습은 40대 중반 즈음 예고 없이 삶의 권태기가 찾아오기 전까지 나를 대변하는 모습이었다.
일도, 우정도, 사랑도 모든 것이 반짝였다.
젊음이 무르익어 가는 시간이었기에 그리 느낄 수도 있다. 그때도 고민과 걱정, 번뇌와 후회의 순간이 있었고 지나친 자신감과 투쟁심으로 몇 가지 기억할만한 실수도 있었으니. 하지만 그런 모든 부정적인 면면을 뒤엎고도 많을 만큼 즐겁고, 행복한 성취와 성과가 유치원에 '잘했어요' 도장처럼 내 뇌리에 깊이 박혀있다.
이런 성취 가운데,
지금도 가끔 무용담처럼 전하는 이야기가 있는데 바로, 엠파스 증권서비스의 도약과 관련한 것이다.
금융서비스 전체를 담당하던 어느 날 본부장님의 호출이 있었다.
"네이버, 다음, 야후는 증권서비스에서 트래픽이 많이 나와 단독 광고를 게시한다는 데 우리 증권서비스는 트래픽이 왜 이 모양이냐?", "그들은 증권데이터를 받아와 실시간 시세 서비스를 직접 하고 있고, 우리는 여전히 제휴사 입점 방식이니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도 이제 제휴서비스에 대해서 관점 전환이 필요합니다." 하여 블라블라 설명을 드렸다.
당시, 상위 검색 포털은 부가 콘텐츠 서비스의 운영 방식을 전문 업체의 입점 방식에서 직접 서비스 형태로 전환을 하고 있었다. 트래픽이 보장되고 검색 콘텐츠 품질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콘텐츠 서비스는 장기적으로 입점비보다는 트래픽에 기반한 광고 수익이 월등히 유리했기 때문이다. 다만, 엠파스는 인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각 서비스에 대한 전문성이 없다는 이유로 매니저(팀장)가 반대하고 있었다. 직접 서비스로 전환할 경우, 고정 입점비에 대안이 부재하다는 것이 표면 상의 이유였지만 본인 스스로가 서비스 운영에 대한 경험과 자신이 없었기에 여러 가지 요인을 리스크로 지적하며 "우리는 할 수 없다."를 기정 사실화 했다. 이런 일로 주간회의 때마다 매니저와 나는 얼굴이 벌겋게 서로 대치하는 일이 많았고, 지속적으로 새로운 방향을 주장하는 내게 선배들은 응원보다는 "쉽고, 편하게 가는 게 서로에게 편하다."는 얘기로 내 의지를 꺾으려 했다.
이런 와중에 본부장의 호출과 질문은 오히려 내게 명분과 동력이 되었다.
증권서비스 개편 프로젝트의 목표를 세웠다. 목표는 검색 포털 증권서비스 1위였다.
어쩌면, 늘 모든 서비스에서 4, 5등을 전전하는 회사에서 1등 서비스를 만들겠다는 포부가 부담스럽게 혹은 아니꼽게 느껴졌을 수 있다. '경쟁사는 증권서비스에만 담당자가 4~5명이나 된다는데 주식 투자 한 번 해 본 적도 없는 네가 경쟁해서 이길 수나 있겠느냐. 큰돈은 아니더라도 입점비라도 받아서 매출이나 유지하자.'라는 게 매니저와 선배들의 심산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누가 뭐라든 나는 내 갈 길을 가기로 했다. 일정과 비용, 투입(필요) 인력을 정리해서 본부장에게 직접 보고했다. 개발자 1명, 디자이너 1명만 달라고 했다. 비용은 KOSCOM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끌어와야 해서 일부 투자가 필요했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나, 아마 월 100만 원 정도로 연간 1,200만 원이 고정비용이 들었을 것이다. 본부장님은 즉시, 대표이사께 보고하고 응답을 받아왔다.
진행해!
3개월의 기획 기간이 필요했다.
입점해 있었던 업체와의 조기 계약 종료에 대한 리스크를 덜어야 했고, 주식 투자 한 번 해 보지 못한 경험을 메워야 했다. 기획 자체보다는 증권서비스에 필요한 콘텐츠를 공급해 줄 수 있는 공급처와 협력해 줄 수 있는 네트워크를 만드는 데 시간을 보냈다. 출근 카드를 찍고 오전부터 퇴근 전까지 여의도를 전전했다. 퇴근 시간 즈음에 들어와 야근을 하며 기획했다.
증권사 12개, 경제 일간지 업체 6곳의 담당자를 만나 콘텐츠 제휴 협약을 맺었다. 이들과 어울리면서 여의도 사람들은 점심 식사에도 반주를 한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그리고, 소맥도 이들에게 배웠다. 재밌으면서도 놀라웠던 건 1시간에서 1시간 반 정도의 식사 시간 동안 꽤 많은 양의 음주를 하고는 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사무실에 복귀에서 일을 한다는 것이었고, 나 역시 자연스럽게 그리 된 듯하다. 아마도 젊고 싱싱한 간이 한 몫했을 것이고, 여러 반대를 무릅쓰고 진행하는 일이었던 터라 정신 무장도 남달랐기 가능한 일상이었을 것이다.
이때는 만난 분 중에 한 분이 머니투데이 온라인사업실장을 하던 전 OO 실장님이었는데, 이분과는 일주일에 한 번 정도는 저녁 시간에 함께 어울렸다. 증권서비스에 대해서 열정만 있던 내게 많은 조언을 해 주셨고, 또 많은 분들을 소개해 주셨다. 한 번은 둘이 술잔을 기울이다 내가 다른 포털의 증권서비스 담당들을 소개해 달라했더니 지금 바로 소개해주겠다고 하시고는 '야후'에 무작정 쳐들어가 당시 야근을 하고 있던 담당자들께 인사시켜주셨던 적도 있었다.
예정된 3개월의 기획 기간이 끝나갈 무렵. 퇴근 즈음에 술 냄새를 풍기며 회사에 복귀한 나를 본부장님이 호출했다. "넌 3개월째 코빼기도 안 보이고, 가끔 보면 술 냄새도 나는 거 같고, 뭐 하고 있냐? 제대로 준비는 하고 있냐? 기획서를 가져와 바라!"
UI설계서, 콘텐츠 기획서, 제휴사 리스트 등 총 200페이지 분량을 출력하여 자리로 찾아갔다. 본부장님은 우선 문서의 량에 놀라워했다. 한 시간 정도 브리핑을 예상했는데 15분여 지날 때쯤 "알았으니, 이제 결과를 만들어 보자!"라고 짧게 코멘트를 주셨다.
엠파스 증권서비스는 2년여간 총 3번의 개편을 진행했다.
3번째 개편 때는 해외 시세와 국내 주식 테마 시세를 반영했고, 검색 결과에서도 주식 정보를 노출하게 됐다. 한화증권과 협업하여 포털에서 주식 계좌를 개설하여 트레이딩 할 수 있는 HTS 서비스도 도입했다. 트래픽을 높일 수 있는 짓은 무엇이라도 했다. 가령, 관리하는 제휴사마다 전 직원의 홈페이지를 엠파스 증권서비스로 하라고 종용하곤 아무 때나 찾아가 그것을 확인한다던지, 엠파스 전 직원의 홈페이지를 증권서비스로 바꾼다던지 뭐...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은 다 해 본 것 같다.
그래서, 결과가 어쨌냐고?
불행하게도 1등은 못했다. 네이버의 증권서비스는 넘어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다음 증권과는 2, 3위 각축을 벌 일 수는 있었다.
첫 개편을 하기 전 엠파스 증권서비스는 1일 UV 15,000명, PV 30,000이었고, 3번의 개편을 거친 2년 후의 결과는 1일 UV 300,000명(20배), PV 1,500,000(50배)로 말 그대로 폭발적인 성장을 기록했다.
이런 성장의 이면에는 엠파스 고객 대상 DM 발송과 엠파스 메인 페이지 관리를 모두 내가 담당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점도 분명 있었지만 어찌 됐던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노력을 기울인 결과였기에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에도 훈장처럼 나들에게 자랑거리로 삼고 있는 성과였다.
그리고, 이 성과의 결과는 팀장 승진으로 이어졌다. 신규 팀장 임명 시에 대표이사께서 "아직 우리가 1등 하는 서비스가 없는데, 1등은 못했어도 2등 서비스를 만든 담당자가 여기 있다. 이제 그를 팀장으로 임명하려 한다."는 멘트를 하셨다. 직장 생활 가운데 Promotion 했던 경험은 적지 않지만, 나는 이때의 짜릿함을 가장 낭만적인 모습으로 기억하다.
가장 중요했던 건, 이 기점으로 해서 입점비 중심의 제휴 서비스를 트래픽 중심의 콘텐츠 서비스로 전환하게 됐다는 점이다. 이는 지속적으로 팀에 주장해 왔던 바를 스스로 증명해 낸 결과일 뿐 아니라, 만년 5위라는 매너리즘에 빠져있던 조직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계기가 된 것이다. 월 300만 원의 입점비를 받던 증권서비스는 월 2,000만 원의 광고 인벤토리를 운영할 수 있는 퍼포먼스로 매출 면에서도 큰 성장을 증명해 내었다.
여의도맨들의 태도도 달라졌다.
처음엔 증권서비스 콘텐츠를 무료로 받아볼 수 있을까 하여 무작정 찾아가 만났던 증권맨 대부분은 나이스한 언사에 뒤에 다소 내려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대했다. 이후 두서너번의 만남, 시시때때로 술자리, 밥자리로 인해 관계는 많이 자연스러워졌고 승진 이후에는 파트너로서 업무 협력을 상호 논의할 만큼 관계의 발전이 있었다. 때로는 처음 보는 분들 조차 내 이름을 알고 먼저 협업 의뢰를 하는 경우도 점차 늘어났다.
증권서비스가 증명되었으므로 모든 서비스는 이와 유사한 방법으로 기획과 운영의 전환이 필요했다. 부동산, 보험, 창업 등의 서비스가 거론되었으나 이것을 한 만한 사람이 정말 없었다. 팀장이 된 나는 다른 업무도 있었기에 모든 서비스를 혼자 기획하여 진행할 수도 없었고, 경험 없는 이들에게 이를 학습시켜 결과를 만들어 내기도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 이 시기에 말도 탈도 많았던 게임 사업본부 운영에 대한 지각변동이 있었다. 본래 우리 제휴비즈니스팀이 운영하던 엔터테인먼트(음악, 운세, 게임 등)를 고정 매출 확보라는 명분으로 게임 사업본부가 인계해 갔다가 퍼포먼스가 나오지 않자 결국, 게임과 음악을 제외한 모든 서비스가 다시 내게로 왔는데, 우리 본부장께서는 다시 인계받은 이 서비스에서도 눈에 띄는 성과를 내어 자랑하고 싶으셨던 모양이다. 인계받은 즉시, 특정 서비스를 거론하며 매출과 트래픽을 얼마나 올릴 수 있겠냐고 물어보시길래 1주일만 시간 주시면 매출은 2배, 트래픽은 5배 올려서 결과 보고드리겠다고 호기롭게 말씀드렸다.
그 서비스는 운세 서비스였다. 그리고, 때는 1월이었다. 바야흐로 운세 서비스의 매출을 가장 많이 나올 때다. 주로 사주팔자와 관련된 신년 운세를 많이 볼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궁합에 대한 이용 빈도가 가장 많이 올라간다. 이때만 해도 대부분 매출이 얼마나 나왔는지만 관심 있어하지 고객 경험(Customer Experience)나 고객 여정(Customer Journey)에 대한 관심은 없었던 터라 나는 그 부분을 제휴사와 논의하여 데이터를 갖춰놓고 있었다.
그래서, 결과는 어땠을까? '내가 맡기 전, 주간 매출 140만 원에서 내가 맡은 후, 주간 매출 400만 원'으로
약 3배가량 증가했다. 본부장님의 좋아하던 모습이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임원 주간 회의 후 회사 내 이런 얘기들이 계속 퍼져갔다. 나의 성과에 대해서 말이다. 나에게 말을 걸고 다가오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근데, 이런 퍼포먼스를 단기간에 낼 수 있는 방법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 없었나 보다. 왜냐면, 그 방법은 매우 단순했을 뿐 아니라, 내가 갖고 있었던 절대적인 권한을 이용했을 뿐, 내가 특별한 어떤 매직을 부린 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나는 광고 카피 문구를 잘 뽑고, 업무에 실수가 적다는 이유로 내 본업 외에 엠파스의 얼굴이 되는 메인 페이지 관리와 고객 DB 발송 업무를 맡고 있었다. 그리고, 콘텐츠 서비스별로 매주 제휴사들에게 트래픽 분석 리포트를 꾸준히 받아왔다. 그런 이유로 1~2월에 운세 서비스를 '사주/팔자보기' 중심으로 알리기보다 '은밀하고 궁금한 너와 나의 궁합 보기(개인정보 철저히 보호)'를 키 콘텍스트로 메인 페이지, DB에 과감하게 홍보 노출을 했을 뿐이다. 결과는 대박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궁합은 결혼을 전제하여 남, 녀가 보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는 심대한 착각이다. 배우자 외에 바람피우는 혹은 홀로 짝사랑하는 이들과 궁합을 보려는 사람들도 엄청나게 많다.
어쨌든,
이렇게 담당자의 재치로 단기적 성과를 올릴 수 있는 서비스가 있는 반면에 증권서비스처럼 오랜 시간 공을 들여서 가꾸고 경쟁시켜야 하는 서비스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서비스를 내가 다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보니 여기저기서 누수와 균열이 나는 경우도 있었다. 어쩌겠는가. 모든 사람이 자기 서비스를 애정하는 건 아니니.
돌아보면 이때 참 즐거웠던 거 같다. 잘했고, 잘 되고, 그만큼 인정받았으니.
더도 덜도 말고, 앞으로의 내 삶에도 이런 퍼포먼스를 단 한 번만이라도 다시 경험할 수 있기를 바라본다.
- 까칠한 펜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