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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만년교생 Sep 29. 2022

어느 날, 노교수를 만났다.

출렁이는 지방 대학의 문제

학부시절 수업을 참 재밌게 하시던 교수님 한 분이 얼마 전 퇴임하셨다. 퇴임하신 후로 이제는 정원이나 가꾸시며 지내실 줄 알았는데 얼마 전 과사무실에 출두(?)를 하셨다. 어찌 먼길 하셨냐고 여쭤보니 대학원 수업을 맡고 있으시단다. 오랜만에 낡은 테이블을 마주 두고 앉아 믹스 커피를 나눠 마시며 짧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교수님, 요새 대학이 많이 바뀐 것 같아요. 아직 마음은 입학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학과들도 많이 변했고 신입생들 입결도 예전 같지가 않아요.


실로 그랬다. 학령인구 감소의 칼바람 앞에 지방 대학들은 우후죽순으로 쓰러지고 있다. 모교는 20여 년 전에 비해서 신입생 규모가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그 폭풍의 시작은 철학과가 사라지는 것이었고, 이제는 인문대에 대대적인 칼질이 시작되고 있다. 그나마 사범대는 입결이 좋고(사실 매우 많이 떨어졌다.) 지역의 인식을 고려하여 잘 살려두고 있는 편이지만, 주변의 여타 사범대에 개설되지 않아서 경쟁력을 갖추고 있는 몇몇 과를 제외하면 한 번씩들 인원 감축이나 폐과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되기도 했다. 대학 구조개편의 큰 폭풍 앞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대학은 얼마나 있을까.


그렇지 많이 변했지. 내가 80년도에 처음 임용되었을 당시랑 비교하면 이루 말할 수 없이 변했어.


못 본 새, 볼이 홀쭉해진 노교수였다. 나이 어려 제일 살이 차오른 부분이 나이 들면 가장 먼저 빠진다고 한다. 그래서 볼과 볼깃살이 홀쭉해지면 어르신의 건강을 살펴보라는 말이 있다. 나는 퍼뜩 노교수께서 안녕하신지를 더듬어보았다.


근데, 변화가 빠른 게 요즘만 그런 게 아냐. 내가 연구년을 다녀온 후에도 학교에 적응하는 데만 한 학기가 걸렸거든. 고작 미국 1년 살이인데도 한국이 그렇게 변했더라고.


때는 2000년 초, 월드컵으로 한창 한국이 시끄러울 때였다. 당시 갖 40대가 된 젊었던 노교수는 미국에서 오늘날 고속도로 하이패스의 전신이 된 미국의 이지패스에 대한 경험을 들려줬다. 옛이야기를 할 때는 눈에 빛이 어른거리는 교수님이었다. 흰머리가 나풀대지만 눈이 빛나는 교수는 옛 수업시간의 그 모습처럼 자신이 겪었던 대학의 변화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냈다.




점차로 대학가의 모습이 많이 변하고 있다. 옆의 일본을 보면 인구가 줄어들며 구제국대학과 지역 별 유서가 깊은 몇몇 대학을 제외하고는 학군이 자체가 쪼그라들었다. 우리의 사회를 보면 언제나 일본을 바짝 뒤좇는다고들 한다. 우리가 갈 길이 일본의 모습이라면 나의 모교는 이대로도 괜찮은 것일까.


며칠 전, 사립 대학의 적립금 투자가 대대적인 손해를 보고 있다는 기사가 올라왔다. 국립대와 달리 적립금의 운용과 투자가 대학의 사활을 결정하는 사립 대학에서는 재정 운용의 적자가 치명적이다. 글을 쓰는 현재, 장중 코스피는 2200 아래로 떨어지고 환율은 1440원대를 넘어서고 있다. 유동성이 커지는 시점이다. 그러나 출렁이는 것은 경제뿐만이 아니다. 지방의 대학들도 다 함께 출렁이고 있다.


이제 정년을 마친 노교수는 그런 대학가의 바람으로부터 한 발 물러섰다. 한 발 물러선 노교수의 마음은 편안할까. 아니면, 당신께서 한평생 있었던 교단이 사활을 걸고 싸워야 하는 이 상황에 연대적인 책임감과 안타까움을 조금은 느낄까. 나는 적의없이 그것이 순수하게 궁금했지만 차마 물어보지 못했다.


교수가 되어 완전한 연구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갖고 있던 나와, 그 과업을 모두 마치고 나온 노교수 사이에 덩그러니 남은 대학이라는 공간은 황량하기만 하다. 한의대 유치를 시도하였다가 재정 문제로 실패했다는 주변의 어느 학교 이야기를 하며 노교수는 말했다.


그 대학이 한의대를 유치했으면 지금 쯤 문을 닫았을 거야. 의대가 들어서면 10년은 대학의 모든 돈을 저 혼자 빨아먹거든. OO대가 병원 세우고 얼마나 힘들었는지는 들어서 알지?


나는 알지 못했다. 대학에서 의대는 못 세워서 안달인 줄만 알았다. 이면을 들춰낼수록 내가 알지 못하는 것들이 많이 있었다. 본가 근처에 서있던 대학들은 언제나 조용하길래 나는 제 홀로 편히 지내는 줄만 알았다. 그러나 실은 살기 위해 각자가 엄청나게 발버둥을 치고 있는 중이었다. 마치 물 위에 떠있는 오리의 모습과 비슷했다.


능력 있는 대학이 살아남아야 하는 것이 맞고, 그것에 대하여 반론의 여지가 없다. 단지, 나의 스승과 후배들이 있는 곳이 30년 후, 100년 후에도 계속 있을지를 걱정해본다. 내가 나의 아이나 손주를 데리고 한 때 아버지이자 할아비가 거닐었던 곳을 보여줄 날이 남아있길 빌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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