쏘는 풀이 있다. 내가 정말 쏘이기 전까진 나도 믿기지 않았다. 십 년 전, 런던에 살고 있을 때 밀톤 케인스에 사는 친구 집에 놀러 간 적이 있었다. 빼곡한 집들과 주차된 차들로 도로가 비좁은 런던과 달리 밀톤 케인스는 우거진 수풀이 여러 집들을 끌어안고 있는 듯 편안하고 아늑해 보였다. 친구와 같이 오솔길을 걷다가 아이들과 공놀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아이가 던진 공이 굵은 가지가 쭉쭉 뻗은 참나무 쪽으로 떨어졌다. 무릎 위로 올라온 풀들을 헤쳐가며 공을 주웠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칠부바지와 양말 사이로 드러난 발목 부분이 뜨끔거렸다. 긁혀서 피가 난 것도 아니고 다쳐서 발목이 부러진 것도 아니었다. 보이는 상처는 하나도 없는데 발목 주위가 벌에 쏘인 것처럼 쓰라리게 아팠다. 그때 알았다. 세상에는 쏘는 풀이 있다는 걸. 그러고 보니 이파리 자체가 톱니처럼 주뼛주뼛하게 서 있는 게 한 성깔 있어 보였다. 줄기 옆으로 나 있는 짧은 털들도 왜 나를 건들었냐는 듯 뾰로통한 모양이다. 그날 나는 쐐기풀(Stinging nettle)이라는 걸 처음 만났다. 비누로 씻어보고 냉찜질도 해봤지만 다음날이 돼서야 통증이 가라앉았다. 내가 그 무시무시한 풀을 다시 기억했을 때는 3년 전 '틸리'라는 조그만 마을이 있는 스코틀랜드로 이사 온 후였다. 틸리마을에 사는 사람이라면 거실이나 부엌, 화장실 창문에서라도 오킬언덕이 안 보이는 곳은 없을 것이다. 친구와 오킬언덕을 올라갔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갑자기 손바닥이 욱신욱신 아리면서 따가웠다. '앗! 쐐기풀을 건드렸구나.'
"기다려 봐. 쐐기 풀 주위를 돌아보면 진정시켜 주는 풀이 있기 마련이야."
같이 산책하던 친구가 땅 밑을 두리번거리더니 두 발짝만큼 앞으로 걸어갔다. 물결처럼 길게 늘어진 푸른 풀의 이파리 하나를 똑 뜯어 나에게 건네주더니 이걸로 문질러 보라고 한다. 초록 이파리를 손바닥 사이에 두고 슈렉의 손바닥이 되도록 비비고 또 비볐다. 놀랍게도 쑤시던 통증이 서서히 가라앉았다. 친구는 그 풀을 도크 잎새(Dock leaf)라고 불렀다. 고작 두 발짝만 움직였을 뿐인데 하마터면 눈앞에 있는 힐링을 놓칠 뻔했다.
고등학교 때 나는 미술시간이 좋았다. '혜영'이라는 내 이름이 벽 어딘가에 내가 그린 그림과 함께 걸려 있었기 때문이다. 유일하게 내 이름이 불려지며 칭찬받았던 과목. 고3 때로 기억한다. 구릿빛에 세련된 양복을 걸치고 뭐라도 부러트릴 것 같은 똘똘한 눈빛으로 3학년 4반 문을 열고 들어 왔던 미술 선생님. 설레던 가슴이 콩닥콩닥 뛰던 날이었다.
"쓰레기 같은 새끼들.. 내가 왜 너희를 가르쳐야 해? 칠판 쳐다봐! 이 OOO들아!"
왕자 같은 입에서 필터에 걸리지도 않은 더러운 말들이 쏟아져 나올 거라는 건 상상하지도 못했다. 우리는 그날부터 꼼짝없이 칠판만 뚫어져라 쳐다봤다. 교실 안으로 무거운 침묵이 짙은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혹시나 침 넘어가는 소리가 선생님 귀에 닿을까 봐 조마조마했다. 비처럼 떨어지던 거친 말들은 머리에서 가슴으로 후드득 떨어졌다.
'저 새끼 또라이야.' '쟤가 교장 아들이래.' 아이들 사이에선 별의별 말과 오만 욕이 떠돌았지만 막상 미술 시간이 다시 돌아오면 어느 누구도 반항하지 못했다. 의자를 앞으로 당기고 허리를 곳곳이 펴서 칠판만 쳐다봤다. 다음 미술 시간에도 또 다음 미술 시간에도. 쐐기풀에 쏘인 것처럼 맞아서 검게 멍든 것도 아니고 넘어져서 다리가 부러진 것도 아닌데 미술시간만 되면 가슴 어딘가가 자꾸 따끔거리고 아팠다. 그때는 아빠의 사업 때문에 온 가족이 서울로 이사간지 1년째 되던 해였다. 3년만 채우면 고등학교를 졸업하기 때문에 나만 부산에 있는 아빠의 친구집에 남겨졌었다. 나는 야간 상업고등학교를 다녔었다. 인문 고등학교 시험에서 떨어지고 유일하게 갈 수 있었던 곳. 공부를 못하는 머저리나 말썽만 피우는 날라리들이 모이는 학교라는 말을 종종 듣곤 했다. 1교시, 2교시. 다음 수업이 이어질수록 창문 밖은 점점 어두워졌다. 과자를 사 먹으러 줄을 서고 있는 매점에서, 29번을 기다리는 버스 정류장에서도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어둠은 계속 나를 따라다녔다. 빛을 놓친 대가가 이런 거라면 감당하겠노라며 괜한 억울함을 삼켰다. 어쩌면 미술선생님이 말한 것처럼 나라는 존재는 쉬 불어오는 바람에도 휘 날아가는 쓰레기가 맞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미술선생님이 오신 지 일주일이 지나서 일어선생님이 새로 오셨다. 민무늬의 검은 원피스에 팔랑거리는 갈색 단발머리가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언니 같은 선생님이었다. 태어나서 처음 배워보는 일어. 혀가 밀어내는 대로 내뱉었던 '히라가나'. 선생님은 어색하게 입 밖으로 떠나간 내 말들을 다독이며 잘했다고 칭찬해 주었다. 50분의 일어 수업이 5분처럼 금방 지나가 버렸다. 일어에 재미도 붙인 데다가 무엇보다도 일어 선생님한테 실망시켜드리고 싶지 않아서 일어만큼은 열심히 공부했다. 어느 날, 무슨 일이였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교복을 입고 선생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그날은 아침부터 학원을 땡땡이치고 오전부터 늘어지게 선생님 집에서 놀았다. 단층집이었는데 뒷마당 정원에 의자 세 개를 놓고 선생님의 엄마, 선생님과 내가 조르르 앉았다. 서먹서먹할 것 같았지만 이상하게도 예전에 알았던 사람을 만난 것처럼 친근하고 편안했다. 우리는 '일어'말고도 좋아하는 음식이 뭔지 이상형의 가수는 누군지를 물어가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딸기와 바나나우유가 우리의 이야기만큼이나 달달했다. 아침에 학교를 갔던 아이들이 시끄럽게 하교를 할 때쯤 나는 일어 선생님과 함께 등교를 했다. 처음으로 늦은 오후에 학교를 가는 게 꼭 나쁘지만은 않다고 생각했다. 그날은 왠지 달덩이를 내 손에 한껏 쥐고 학교를 오르는 기분이었다. 어김없이 쐐기풀 같은 미술시간이 찾아왔지만 그 살벌한 시간을 잘 버틸 수 있었던 것 또한 미술수업이 끝나면 일어 수업이 바로 있었기 때문이었다. 왼쪽 보조개가 깊이 들어가도록 활짝 웃는 얼굴로 일어선생님이 우리 반으로 들어왔고 나도 모르게 실실 웃음이 새어 나왔다. 어두운 창문으로 투영되는 나와 선생님의 모습이 참 좋았다. 밝게 빛나는 달이 있는 어두움은 머물고 싶기에 충분했으니까. 일어 선생님은 나에게 두 발짝거리에 있었던 도크 잎새와 같았다. 선생님의 초록 마음이 내 마음을 비비면서 욱신거리고 따가웠던 마음이 차차 괜찮아졌다.
위로는 반드시 말이 아니라, 어떤 풍경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우리는 달빛에도 걸을 수 있다.>
-고수리 에세이-
돌이켜보면 일어 선생님과 주고받았던 특별한 말들이 기억에 남지는 않는다. 다만 일어 선생님의 초록마음과 창문에 비쳤던 선생님과 나의 모습은 아직도 잔잔한 웃음을 가져다준다. 살다가 살다가 갑자기 내 인생에 훅 들어온 쐐기풀이 있다면 한 가지 기억하길 바란다. 두 발짝거리에 있던 도크 잎새처럼 위로는 생각보다 가까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저 큰 산을 넘어 멀리 가지 않고도 한참을 뒤적이며 깊게 들춰 보지 않아도 겨우 두 발짝만 움직일 만큼의 익숙한 자리에서 도크 잎새를 만날 수 있을테니까. 보슬보슬 거리는 비가 한참이나 떨어지고 나서야 무지개가 길게 기지개를 켜는 것처럼 위로는 특별하면서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다가올 거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