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살 아들과의 얼음 데이트
아들이 얼음 테이블을 만들었단다. 학교에서 오자마자 총총걸음으로 뒷마당을 가더니 부엌에 있던 나에게 빨리 나오라며 창문을 두들겼다. 어찌나 다급하게 두드리던지 나도 종종걸음으로 밖을 나갔다. 모래만 담겨있던 하얀 화분 위로 꽁꽁 얼은 얼음이 신기하게도 테이블처럼 동그란 모양이었다. 아니 이런 걸 어떻게 만들었을까. 자랑할만도 하지. 호기심에 가득 찬 내 눈빛을 본 아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양동이에 고여 있던 빗물이 밤새 시즐시즐하더니 얼음 테이블이 되었어요.”
양동이 위로 얼은 동그란 얼음을 하얀 화분 위로 얹어 놓으니 어느 커피숍 부럽지 않을 작은 얼음 테이블이 만들어졌다. 무엇보다도 아들이 말한 '시즐시즐'이라는 표현이 마음에 들었다. 시즐시즐은 지글지글처럼 고기를 숯불에 구울 때 내는 의성어다. 하긴 밤새 찬 바람에 시즐시즐 구워지면 얼음 테이블이 될 만도 하겠다. 여섯 살 아들이 쓴 단어치고는 제법 괜찮은 표현이었다.
"그럼 얼음 테이블에서 우리 데이트해야겠다"
얼른 부엌으로 들어가 물을 끓였다. 그리고 토끼 마시멜로를 띄운 핫초콜릿 한 잔과 페퍼민트 한 잔을 만들었다. 아들은 기분이 좋았나 보다 물어보지도 않았던 학교 일과를 따다다다딱 딱따구리처럼 말을 멈췄다가 이어가기를 반복했다.
화장실은 냄새가 나. 내일은 마스크를 가져가야겠어.
아이들이 먹고 난 쓰레기를 운동장에다 버려.
맥시는 내 얼굴이 갈색이라고 나랑 놀지 않겠대. 치.
엄마, 나 학교 알레르기가 생겼나 봐. 학교 가면 안 될 거 갔어.
결론은 학교 가지 않겠다는 거였다.
아들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자니 내가 아들만 했을 때가 떠올랐다. 이제 막 학교 생활에 적응하던 국민학교 1학년. 유치원과 다르게 푸세식 화장실이 운동장 옆에 있었다. 코를 막고 화장실 칸막이 안으로 들어가는 게 고역이었다. 네모난 구멍 주위로 이미 흘려진 똥과 오줌을 피하려고 어정쩡하게 앉아서 쉬를 봐야 했다. 그날도 이래저래 어설프게 다리를 벌리려다 그만 한쪽 발이 구멍 안으로 빠져버렸다. 어찌나 당황스러웠던지 그 와중에도 생각보다 깊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게 뚜렷하게 기억난다. 질퍽거리는 한 발을 꺼내면서 퐁퐁 울었다. 그날은 볼 일도 못 보고 화장실을 뛰쳐나와 집으로 뛰어갔다. 밟는 곳마다 바지 끝으로 오물이 뚝뚝 떨어졌다. 나도 정말 학교 가기 싫었다.
"엄마도 너만 했을 때 학교 가기 싫었어."
아들은 싱겁게 한 번 웃더니 의자 밑에 있던 축구공을 힘껏 발로 차며 축구하자고 멀리 뛰어갔다. 뒷마당 잔디 위로 새벽에 내렸던 눈이 여전히 녹지 않고 앉아있었다. 미끄러울 것 같았지만 오히려 얼음 알갱이들이 빙판 위의 모래알처럼 밟히는 느낌이 좋았다. 4미터 되는 바른 네모꼴 잔디 위로 놓인 네 개의 빨래봉을 골대 삼아 각자의 구역을 정했다. 처음에는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넣고 슬렁슬렁 공만 차다가 공을 뺏고 밀치고 당기고 엎어지고 쓰러지고 난리를 쳤다. 아들은 이쪽으로 넣는 척하면서 다른 방향으로 골을 넣는 기술까지 엿보였다. 최다골을 기록한 나로서 우승을 코 앞에 두고 있었는데 아들은 내가 반칙을 했다며 자꾸 패널킥을 때렸다. 뭔가 억울한데도 규칙을 모르는 나로선 계속 점수만 빼껴버렸다. 아무튼 간신간신 이겼다. (아들한테는 물어보지 마시길.)
뻐근해진 장딴지를 따스운 이불속으로 집어넣었다. 잔뜩 힘이 들어갔던 종아리가 시즐시즐 거리는 기분이었다. 문득 '시즐시즐'이라는 단어는 양동이에 고였던 물만이 아니라 사람도 마찬가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밤새도록 찬바람에 시즐시즐 거리면 꽁꽁 얼어붙기도 하고 따뜻한 바람에 시즐시즐 거리다 보면 살살 녹기도 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고 보니 학교 가기 싫은 아들은 분명 시즐시즐 중이다. 오늘 아침에도 학교가지 않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어쩌면 며칠 동안 아니면 몇 달 동안을 시즐시즐 거릴지도 모른다. 아들이 꼭 한 가지는 알았으면 좋겠다. 시즐시즐전과 후는 분명히 달라질 거라는 걸. 그게 차디찬 얼음 덩어리가 되었을 지라라도 절대 실망하지 않기를 바란다. 누군가에게는 평생 기억할 만한 쉼과 웃음을 안겨다 줄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