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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스혜영 Mar 01. 2023

코끼리 똥 누는 소리 하네.

가슴을 철렁 이게 하는 초등학교 운동장의 낙서

"I hate you because you have brown skin!" (나는 갈색 피부를 가진 네가 싫어!)

학교 가기 싫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고 주먹질에 발길질이며 신발 던지기까지, 이제는 아들의 아침 일상이 되어 버렸다. 아들은 초등학교 2학년으로 올라가면서 맥시라는 아이를 만났다. 맥시는 학급에서 유일하게 흑인인 아들의 갈색 피부가 싫다며 노골적으로 따돌렸다. 맥시는 아들을 향해 "나 쳐다보면 죽을 줄 알아." 무시무시한 협박까지 했다. 6살 아이가 이런 말을 할 수 있다니. 놀라우면서도 그 협박의 대상이 우리 아들이라는 사실에 가슴 한 구석이 잘려 나간 듯 아팠다. "걔가 나를 어떻게 죽여. 말도 안 되지?" 아들은 기가 막힌다는 듯 말했고 나도 코끼리가 똥 누는 소리라고 콧방귀를 뀌었다. 역겨운 냄새가 나니까 창문을 열어야 한다고 호들갑도 좀 떨었다.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다고 발버둥 치는 아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 가면서도 학교를 기어코 보내는 내가 잘하는 짓인지. 투두둑, 무거운 벽돌 덩어리가 심장으로 쏟아지는 기분이다. 담임 선생님과 교장선생님께 말했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이른 아침, 식탁에 앉아 토스트를 먹던 아들의 눈에서 이슬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흘렀다. 

"아빠, 왜 나는 갈색 피부를 가진 걸까? 나도 흰색 피부면 좋겠어."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이 한 말은 처음이 아니다. 두 딸이 유치원 다닐 때도 똑같이 했던 말이었다. 남편이 누렇게 토스트 된 식빵에 초코 누텔라를 바르며 말했다. 

"나는 부드럽고 진한 초코 누텔라라고 해."

나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토스트기에서 막 튀어나온 따뜻한 식빵에 마멀레이드 잼을 바르며 노란빛이 반짝거리는 오렌지 잼은 '나'라고 말했다. 

마침 땅콩 알갱이를 와그작와그작 씹고 있던 아들이 소리쳤다. 

"....... 그럼, 나는 달콤 고소한 피넛버터잼이겠네!"

딸도 이 상황을 눈치챘던지 노랗게 구워진 베이글 위로 하얀 크림치즈를 듬북 바르며 베이글에는 뭐니 뭐니 해도 입에서 사르르 녹는 크림치즈라며 한쪽 눈썹을 찡긋 추켜올렸다. 

"너 그거 알아? 여름이 되면 우리 모두가 벌겋게 달아올라. 여기 딸기잼처럼." 

딸의 말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온 세상의 잼들이 멸종하고 유일하게 딸기잼만 살아남았다고 생각해 보자. 별의별 잼이 다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나로서는 '토스트 세계의 재앙이 시작되었습니다'라는 어마무시한 말이랑 같은 소리로 들릴 것이다.

'Differences are never boring. We need to celebrate our differences'

다름은 절대 지루하지 않다. 오히려 우리는 다름을 축하하고 고마워해야 한다. 


어느 토요일 아침, 쓰레기를 주우러 나갔던 남편한테서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라는 메시지와 함께 보내왔다.

시멘트 바닥 위로 N..., C..., P...라는 글자가 '못생겼다' '미쳤다' '꺼져라'라는 단어와 함께 어지럽게 적혀있었다. N과 C는 흑인을 욕하는 말이고 P는 파키스탄인을 욕하는 말이다. 

스코틀랜드 인구의 95.4%가 백인이다. 다른 백인 소수 민족으로는 4.2%가 폴란드인과 아일랜드인이고 다음으로는 2.8%인 아시안계가 있다. 그중 파키스탄인이 중국인보다 더 많다. 흑인은 1%를 조금 넘는다. (2020년도 스코틀랜드 인구조사 참고)


남편은 글을 보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무너졌다고 했다. 술을 잔뜩 마신 김에 어설프게 흐려놓은 글이 아니라 누군가에게 똑바로 쳐다보라고 또박또박 대문자로 적었다. 무엇보다도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운동장이라 더욱 가슴이 아팠다. 초등학생이 적었다기보다는 밤에 운동장을 서성이던 큰 아이들이 적지 않았을까 짐작해 본다. 그들이 특정 집단을 가리켜 보란 듯이 경멸하고 혐오스러움을 내뱉은 이유는 뭘까. 왜 그토록 싫은 걸까? 


내가 초등학생 때 영화 '부시맨'을 보고 모든 흑인은 다 부시맨인 줄 알았다. 난생처음 보는 빈 콜라병을 신의 물건이라고 생각하고선 평화로왔던 마을에 분쟁을 일으켰던 부시맨 말이다. 영화의 주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거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도 나는 흑인을 멍청한 미개인으로 머릿속에 저장했다. 결정적으로 내 저장이 틀렸음을 깨달았을 때는 2005년도에 개봉한 Mr 히치를 극장에서 보면서였다. 주인공 윌 스미스가 어찌나 잘생겼던지 홀딱 반해버렸다. 그래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남편을 만나면서 지금은 모든 흑인이 다 젠틀맨으로 보인다는.(거짓말 조금 보태서..)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남편한테서 다른 사진이 날아왔다. 

쓰레기를 줍는 친구들끼리 N은 Love(사랑)으로 P는 Beautiful(아름다움)으로 C는 Compassion(공감)으로 바꿔 적었단다. 무겁고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우리는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집단을 내 나름대로 '이렇다' '저렇다' 저장하고 정의할 때가 있다, 기계가 아닌 이상 한번 저장된 인식이 쉽게 쓰레기통에 버려지지 않는다는 사실도 잘 안다.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몰랐던 것들. 철저히 맞다고 생각했지만 아닌 것들.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 나랑은 너무 다르고 생소한 것들에 조금씩 관심을 가져보면 어떨까. 저장하다 지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예전의 나보다 더 괜찮은 나를 발견하게 되리라 믿는다. 시작은 태평양을 건너 아주 머나먼 나라가 아니라 코 앞에 있는 이웃부터 돌아보기다. 


어제는 아들의 친구 헬리나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헬리나는 우크라이나에서 스코틀랜드로 온 지 8개월이 됐다. 우크라이나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와 아들이, 스코틀랜드에서 0.001%나 될까 하는 우크라이나인을 만날 수 있다는 건 정말 축하할 일이다. 어린 맥시와 땅바닥에 나쁜 글을 쓴 친구들도 곧 알게 되리라 믿는다. 다름은 절대 지루하지 않다는 걸. 또한 함께 축하했을 때 그 기쁨이 두 배 열 배 백 배 만 배가 될 거라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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