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슴을 철렁 이게 하는 초등학교 운동장의 낙서
아들의 주먹질과 발길질은 더욱 심해졌다. 현관문 앞에서 겨우겨우 신겼던 신발을 멀리 집어던지기도 하고 현관문부터 학교 입구까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들의 아침은 이렇게 시작된다. 초등학교 2학년인 아들이 맥시라는 아이를 만나면서부터였다. 맥시는 학급에서 유일하게 흑인인 아들의 갈색 피부가 싫다며 노골적으로 따돌렸다. 맥시는 아들을 향해 쳐다보면 죽는다고 협박까지 했단다. 6살 아이가 어떻게 저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놀라우면서도 그 협박의 대상이 우리 아들이라는 사실에 가슴 한 구석이 잘려 나간 듯 쓰라렸다. 아들은 맥시의 말을 되씹다가 사람이 사람을 죽일 수 없다며 '흥'하고 고개를 절레 흔들었다. 나도 코끼리가 똥 누는 소리라며 '쳇'하고 콧방귀를 꿨다. 역겨운 냄새가 나니까 창문도 열어야 한다며 호들갑도 떨었다. 아침마다 학교 가기 싫다고 발버둥 치는 아들의 마음이 충분히 이해 가면서도 학교를 기어코 보내는 내가 잘하는 짓인지. 무거운 돌 덩어리가 투두둑 심장으로 쏟아지면서 구멍이 난 기분이었다. 담임 선생님과 교장선생님께 말했지만 상황은 생각보다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이른 아침, 식탁에 앉아 토스트를 먹던 아들의 눈에서 이슬 같은 눈물이 방울방울 흘렀다.
"아빠, 왜 나는 갈색 피부를 가진 걸까? 나도 흰색 피부면 좋겠어."
아이러니하게도 아들이 한 말은 처음이 아니다. 두 딸이 유치원 다닐 때도 똑같이 했던 말이었다. 남편은 누렇게 토스트 된 식빵에 초코 누텔라를 바르며 말했다.
"나는 부드럽고 진한 초코 누텔라라고 해."
나는 무슨 말을 하려는지 금방 알아차렸다. 토스트기에서 막 튀어나온 따뜻한 식빵에 마멀레이드 잼을 바르며 노란빛이 반짝거리는 오렌지 잼이 '나'라고 소개했다.
마침 땅콩 알갱이를 와그작와그작 씹고 있던 아들이 소리쳤다.
"....... 그럼, 나는 달콤 고소한 피넛버터잼이겠네!"
딸도 이 상황을 눈치챘던지 한마디를 거들었다.
"너 그거 알아? 여름이 되면 우리 모두가 벌겋게 달아올라. 여기 딸기잼처럼."
딸의 말에 절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온 세상의 잼들이 멸종하고 유일하게 딸기잼만 살아남았다고 생각한다면 '토스트 세계에 큰 재앙이 터졌습니다'라는 어마무시한 말과 같은 소리일 것이다. 다름은 절대로 지루할 수가 없다. 오히려 우리는 다름을 축하해야 한다.
어느 토요일 아침, 쓰레기를 주우러 나갔던 남편한테서 사진 한 장이 날아왔다. '초등학교 운동장에서'라는 메시지와 함께 보내왔다.
시멘트 바닥 위로 N..., C..., P...라는 글자가 '못생겼다' '미쳤다' '꺼져라'라는 단어와 함께 어지럽게 적혀있었다. N과 C는 흑인을 욕하는 말이고 P는 파키스탄인을 욕하는 말이다.
남편은 글을 보자마자 다리가 후들거리고 가슴이 무너졌다고 했다. 술을 잔뜩 마신 김에 어설프게 흐려놓은 낙서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똑바로 쳐다보라고 또박또박 대문자로 적었다. 초등학생이 적었다기보다는 밤에 운동장을 서성이던 큰 아이들이 적지 않았을까 짐작해 보지만 아들이 다니는 초등학교 운동장이라 더욱 가슴이 아팠다. 그들이 특정 집단을 가리켜 보란 듯이 경멸하고 혐오스러움을 내뱉은 이유는 뭘까. 왜 그토록 싫은 걸까?
내가 초등학생 때 영화 '부시맨'을 보고 모든 흑인은 다 부시맨인 줄 알았다. 난생처음 보는 빈 콜라병을 신의 물건이라고 생각하고선 평화로왔던 마을에 분쟁을 일으켰던 부시맨 말이다. 영화의 주 내용은 내가 생각했던 거와는 아무 상관이 없었는데도 그때부터였을까. 흑인을 멍청한 미개인으로 머릿속에 저장했던 때가. 결정적으로 내 저장이 틀렸음을 깨달았을 때는 2005년도에 개봉한 Mr 히치를 극장에서 보면서였다. 주인공 윌 스미스가 어찌나 잘생겼던지 홀딱 반해버렸다. 그래서 지금의 남편을 만났을지도 모른다. 남편을 만나면서 지금은 모든 흑인이 다 젠틀맨으로 보인다는.(거짓말 조금 보태서..)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남편한테서 또 다른 사진이 날아왔다.
쓰레기를 줍는 친구들끼리 N은 Love(사랑)으로 P는 Beautiful(아름다움)으로 C는 Compassion(공감)으로 바꿔 적었단다. 무겁고 복잡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지는 듯했다.
나도 모르게 한 번도 만나지 않은 어떤 집단을 내 나름대로 '이렇다' '저렇다' 저장하고 정의할 때가 있다, 기계가 아닌 이상 한번 저장된 인식이 쉽게 쓰레기통에 버려지지 않는다는 사실 또한 잘 알고 있다.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몰랐던 것들. 철저하게 맞았다고 고집했지만 아닌 것들. 머리카락부터 발톱까지 나랑은 너무도 다르고 생소한 사람을 만나고 알아가면서 머릿속에서 먼지가 쌓이고 곰팡이가 피도록 저장되었던 것들이 잘 못 되었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 있다. 저장하고 지우고 다시 저장하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순간 예전의 나보다 더 괜찮은 나를 발견하게 될 거라 믿는다.
어제는 아들의 친구 헬리나가 우리 집에 놀러 왔다. 헬리나는 우크라이나에서 스코틀랜드로 온 지 8개월이 되었고 동네 도서관에서 운영하는 영어교실을 다니고 있다. 모르는 단어가 나오면 번역기를 눌러가면서 우크라이나에서 유명한 요리는 무엇이고 지금쯤 볼 수 있는 거리풍경은 어떤 건지 그의 조그만 핸드폰으로 동그란 머리를 들이대며 구경하는 일은 흥미로웠다. 다름은 절대 지루할 수가 없다. 우크라이나에 한 번도 가보지 못한 나와 아들이, 스코틀랜드에서 0.001%나 될까 하는 우크라이나인을 만날 수 있다는 건 더없이 축하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