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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스혜영 Aug 03. 2022

130살 돌집이 엄마 주름과도 닮았다.

우리 집 창문은 남편만 열 수 있다. 늘어진 이두박근에 잔뜩 힘을 주어도 안 되는 게 있다. 구닥다리 창문은 두터운 목재로 만들어졌고 두 개의 고리를 잡아 아래에서 위로 올려야 한다. 마치 뿌리 깊게 내린 나무를 매일 들어 올려야 하는 것처럼 나에게는 무겁고 버거운 일이다. 오래된 건 창문만이 아니다. 집의 외곽 벽은 영국 빅토리아 여왕 시대 때 만들어졌다. 다시 말해서 조선 건국 오백 주년이 되는 해, 1892년. 올해로 130살이 되었다. 


 처음으로 남편 따라 영국이라는 나라에 왔을 때가 기억난다. 세련되고 날씬하게 우뚝 솟은 아파트는 없고 색이 바랜 벽들과 낡아빠진 굴뚝. 고만고만하게 생긴 단층집들만 눈에 띄었다. 내가 생각했던 영국의 풍경과 달라 실망이었지만 영국에 살면 살수록 내가 틀렸음을 금방 깨달았다. 예를 들어 오래된 기차역을 큰 중고서점 도서관으로 재탄생시킨 안 위크의 바터 서점(Barter Books)은 유럽에서 큰 명성을 얻고 있다. 구와 신의 오묘한 조화. 그게 고귀한 영국 다움을 만들었을 테다. 


 우리 마을은 한때 탄광 말고도 채석장의 중심지였다. 부엌에 앉아 있으면 창문 너머로 오킬산이 보인다. 오르다 보면 거대한 용이 산의 허파 한쪽을 집어삼킨 것 같은 자국이 휑하게 남아있다. 그 사암 덩어리를 박살 내고 쪼개고 다듬어서 오두막집이었던 이 마을을 돌집으로 업그레이드하기 시작했다. 내 상반신만 한 돌덩이가 있는가 하면 손바닥만 한 돌덩이도 있다. 이 돌들은 두루뭉술하거나 다각형이라고 하기에는 어정쩡한 꼴로 들쑥날쑥 뒤섞여 있다. 내가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돌에 새겨진 무늬다. 판에 박히지 않고 가공되지 않은. 세월을 고스란히 품고 있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 대각선의 빗물이 새겨진 돌이 있는가 하면 바람에 밀려 파도같이 잔잔한 물결 모양을 하고 있는 것도 있다. 태풍에 떨어져 나갔는지 한 개의 주먹이 들어가고도 남게 파여있는 돌도 있다. 


 돌은 거짓말을 못한다. 괜찮은 척 보기 좋은 척 살만한 척 치장하지 않고 바람 따라 비 오고 눈 오는 대로 깎아진 채 날이 선채 긁힌 채 숨기고 싶은 흔적마저 오롯이 남기고 있다. 돌 하나하나에 새겨진 무늬가 130년 돌의 인생을 보는 듯하다. 돌을 자꾸 만지다 보니 그 무늬가 세월을 제법 먹은 사람의 주름과도 같다. 어떻게 보면 한국전쟁 당시 오빠를 잃고 감자 몇 알로 허기진 배를 채워야만 했던 어린 엄마의 주름과도 닮았고 자메이카에서 낯선 영국 땅으로 이민 왔던 17살 소녀, 삼십년 넘도록 평생을 일했지만 흑인이라는 이유로 승진 한번 하지 못했던 시어머니의 주름과도 닮았다. 


 최근 우리 돌집에 대단한 변화가 생겼다. 현관문 바꾸기. 너무 오래돼서 밑으로 바람이 술술 새어 들어오고 무엇보다 두 손을 사용해도 문이 잘 열리지 않는다. 색이 바랜 붉은 돌벽 사이로 말쑥한 청록색 문이 들어와 번쩍거린다. 그렇게 구와 신이 만나 앞으로 백 년 천년을 더 살아갈까. 절대 추하거나 초라하거나 촌스럽지도 않을 삶을. 


모처럼 햇살이 돌벽 위로 사뿐히 앉았다. 깊게 새겨진 주름의 구석까지 햇살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나도 햇살 한 자락을 손에 얹고 훌쩍 지나가 버린 내 인생의 주름들을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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