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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 Jun 15. 2024

이런 플러팅의 계절

온갖 채소들이 들이댄다

아빠가 새벽에 텃밭에 가더니 채소 한 바구니를 가져왔다. 내가 제일 좋아하고 보기만 해도 기분 좋아지는 양배추, 브로콜리, 오이, 그리고 파. 올해 첫 수확물은 아니다. 제일 처음 상추가 있었고, 그다음엔 오이를 두어 번 따오긴 했지만 오늘처럼 다채롭고 풍성한 채소 바구니는 처음이다.


아빠 텃밭에서 수확한 제철 채소


브로콜리는 친구가 심고 남은 모종을 거저 줘서 올해 처음 심었다고 한다. 모종이 꽤 비싸다고 했던 거 같다. 바로 데쳐서 초고추장에 찍어 먹었다. 파는 두고두고 먹고, 파뿌리도 엄마가 진짜 좋아하는 건데 육수 낼때 쓰려고 말려두려고 한다. 오이는 그냥도 먹고, 쌈장에 찍어도 먹고, 오이냉국도 해 먹고, 새콤달콤하게 무쳐 먹을 거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건 양배추다. 아삭아삭한 식감과 달달한 맛. 반으로 갈라 반은 바로 삶았고 반은 냉장고에 넣어두었다. 주말에 오는 남편과 딸, 그리고 동생 몫이다.


아빠 친구 행자 씨의 호박 플러팅


오늘은 아파트 앞 장날, 마실 삼아 아빠가 장에 나가더니 까만 봉지를 들고 왔다. 꺼내보니 작고 윤이 나는 귀여운 호박 두 개가 나왔다.


샀어?

사긴. 누가 줬어.

누가?

신백동 사는 행자


행자 씨는 아빠 초등학교 여자 동창이다. 소현이네 식당 바로 앞에서 고추 팔고 호박 파는 여자가 아빠 초등학교 동창이라고 하마 몇 번을 이야기했다. 그래서인가. 아빠는 살 게 없어도 장날만 되면 괜히 나갔다 온다.


엄마, 아빠가 행자 씨랑 바람난 거 아니야?

아니야. 그런 재주는 없어.


지금은 말을 거의 못 하지만, 한 달 전만 해도 평소 그렇듯이 엄마를 놀려 먹으면 엄마는 단언하곤 했다. 정신이 없는 중에도, 말이 사라지는 중에도 주저함이 없던 대단한 자신감이다.


행자 씨가 하나는 볶아 먹고, 하나는 찌개 끓여 먹으라고 했다고 한다. 엄마가 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호박을 얇게 저며서 소금 뿌려 놓으면 물이 나오고, 촉촉한 물기 덕분에 색이 고와진다. 들기름에 새우젓 넣고 들들 볶으면 반들반들하게 예뻐진다. 예쁜 만큼 맛있냐, 하면 그건 아니다. 원래 맛없는 호박인 건지, 내가 뭘 잘못한 건지, 맛이 없고 퍼석하다. 에잇, 난 안 먹으련다. 이건 다 아빠 차지다.


안 그래도 여기저기 먹을 게 넘쳐 나는데, 남편까지 가세했다. 우리 집 그늘진 마당에서 마구 퍼지고 있는 머위대를 꺾어 왔다. 머위대는 머위라는 나물의 줄기로, 엄마가 진짜 환장한다. 머위대는 까보면 안다. 섬유질 덩어리다. 그리고 셀러리처럼 아삭아삭한 식감이 죽인다. 데쳐서 껍질 까서 엄마 입에 넣어주었다. 아삭아삭, 정말 잘 먹는다. 다 죽어가는 거 같아도 잘 먹으니 얼마나 다행인지.


머위대
머위대 섬유질은 실 같다


작은 텃밭이라도 있고, 주위에 농사짓는 사람들이 있는 지방소도시에서는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채소들이 들이댄다. 대단한 결심을 하지 않아도, 애쓰지 않아도 저절로 채식주의가 되고, 밖에 나가지 않아도 계절을 감각하고 계절을 먹고살 수 있다. 이런 재미라도 없으면 어떻게 사나. 지금 나의 유일한 낙이라고 해야 하나. 엄마에게 죽음의 그림자를 볼 때마다 살고 싶지 않은데 계절이 자꾸 들이대며 그래도 살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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