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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Aug 23. 2024

어떤 자부심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가능했던 그곳

엄마?

응, 학교 끝났어?

응.

이제 뭐 할거야?

오늘은 도서관 문 닫는 날이라 그냥 집에 가야겠지?

도서관 월요일에 휴관 아니야?

아니야. 금요일로 바뀌었어. 오늘 같이 바람 부는 날에는 바람계곡*에 가야 하는데 학교에서 걸어 가기에는 너무 멀어서 못 가겠고…


가보면 별거 없는 휑한 언덕일 뿐이지만 딸이 다닌 어린이집에서는 바람이 많이 분다고 바람계곡*이라 불렀고, 아이들이 매일 나들이 가서 흙 파고 놀던 곳이다.


어릴 적 뛰어놀던 때가 그립구나?

응, 가끔 정말 그래. 중학생이라도 어릴 때처럼 놀고 싶은데 보는 눈이 있어서 그렇게 못 노는 거거든. 지나고 보니 그때가 참 좋았던 거 같아.

지나고 보면 그렇지?

참 엄마 있잖아. 오늘 친구들이랑 얘기하다가 깨달았는데 교가에는 꼭 산이 나온다. 알아?

응, 맞아. 엄마 초등학교 교가는 용두산 힘찬 기운, 이렇게 시작해.

그러니까 우리나라 사람들 참 산 좋아해.

우리나라에 산이 많으니까 그렇지.

엄마는 용두산 가봤어?

아니, 지금은 알지만 옛날엔 어디 있는지도 몰랐어.

그치? 다른 초등학교에서 온 친구들 물어보니까 다 어디 있는지도 모른대. 근데 나는 교가에 나오는 산에 정말 많이 가서 놀았잖아. 어린이집에서는 매일 갔고, 초등학교에서도 일주일에 한두 번은 꼭 갔으니까. 그게 정말 기억에 남아.

엄마가 다른 건 몰라도 엄마 어렸을 때처럼 산으로 들로 다니면서 놀게 하고 싶어서 찾아간 동네잖아.

그러니까 그런 엄마를 칭찬한다고.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해주면 너무 고맙지.

물론 도시나 시내 학교 다니는 애들한테 뭐하고 놀았는지 물어보면 나름대로는 자연을 접하려고 노력했더라고. 뭐 가끔 산에도 가고 식물도 키우고 놀이터에서 모래 만지면서 놀았다고는 하는데 들어보면 우리가 노는 방식은 차원이 다르거든. 아무 것도 없이 그냥 흙 파고 나뭇가지와 잎사귀만으로 온갖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무엇이든 될 수 있고, 모든 것이 발견되고 모든 것이 가능했던 곳이거든. 난 정말 그런 동네에서 뛰어놀았다는 자부심이 있어.

, 그런 자부심, 감동이다. 엄마도 시골에서 뛰어놀아서 다리 튼튼하고 나무 이름 하나라도  알아서 좋다는 생각은 했어도 자부심까지는 생각 못했어.

맞아. 나도 다리 튼튼하잖아. 지금도 많이 걸어 다녀서 다리 튼튼하잖아. 운동화가  떨어진다는  단점이지만.

맞아. 요즘 세상에 많이 걸어다녀서 운동화 구멍 나는 중학생은 너밖에 없을 거야.


지치고 힘들 때마다 나는 내 마음 속에서 펼쳐지는 어딘가에 가서 쉬곤 했다. 나중에 알았는데 거기가 내가 어릴 때 뛰어놀던 곳이었다. 기차역 앞에 집이 있었고 기찻길을 따라 가면 화산 개울이라고 불리는 개천이 있었고, 흔들거리는 다리를 건너가면 논이 펼쳐졌는데 논두렁을 따라 걷다보면 두루미(어릴 땐 학이라고 불렀다)를 자주 만났는데, 그럴 때 내 (남자)친구 태경이가 노래를 불렀다. 학아, 학아, 날아가라, 너네 엄마 기다린다, 지금 가지 않으면 영영 못간다, 대략 협박조의 노래였는데 신기하게 학이 날아갔다. 태경이의 호위를 받아 우리가 도착한 곳은 화산이라고 불리는 작은 산이었고 거기서 토끼풀로 반지 만들어 끼워주고 놀다가 어둑어둑해져서 집에 돌아오는 길에 흔들거리는 화산개울을 건널 때 애들이 물귀신이다, 하고 뛰기 시작하면 달리기 못하는 나는 못 따라가서 울면 태경이가 와서 나를 데려가곤 했다. 그때 놀던 이미지가 아직까지도 그림처럼 남아있는데 그걸 딸에게도 물려주고 싶어 수도권에서 시골 정경을 간직한 곳을 찾다가 정착한 곳이 바람계곡이 있는 그 동네였다. 그곳은 그런 지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모여 살았고, 이상과 현실의 괴리로 인해 그곳에서의 삶이 해피엔딩으로 끝난 것은 아니었는데 다행히 딸은 그곳에서의 삶에 만족을 넘어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니 얼마나 다행인지. 애들은 이렇게 건강하게 잘 크고 행복했는데 오히려 미성숙한 어른들끼리 지지고 볶고 그랬던 시간이 부끄러움으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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