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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요유 Aug 31. 2024

간병하는 사람에게 꼭 필요한 것

집 나올 궁리

딸이 왔다. 곧 시험이라고 집에서 공부했으면 하는 애를 잘 구슬려서 오게 만들었다. 구슬리는 수단 중에 하나가 웬만하면 텅 비어있어 언제든 우리를 환대하는 도서관이다. 밥만 먹고 도서관에 같이 가기로 했다. 딸 혼자 가라고 할 수 있지만, 딸을 핑계로 나도 오늘 집 나갈 결심을 했다. 밥 해서 엄마 먹이고, 점심밥은 미리 차려놓고 아빠에게 엄마를 맡기고 딸과 함께 집을 나왔다.


집 나오니까 이렇게 좋구나.


집안 일 하느라 집안을 종종거리다가 곧게 뻗은 직선도로를 걷는 시원한 걸음은 오랜만이다. 얼마 전에 새로 문을 연 예술의 전당 벽에 걸린 콘서트 홍보 현수막 위에 내가 좋아하는 가수의 이름이 들어있었는다. 콘서트에 갈까 말까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기분 좋게 뛰었다. 봄부터 공사 가림막에 가려져 있던 시민회관이 문을 열었지만 나중에 가보기로 하고 우리는 그 앞 도서관으로 들어왔다. 로비에는 가을이라 독서 행사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 있고, 열람실이 있는 3층으로 올라오는 계단에는 9월부터 시작하는 하반기 시민대학 교양 강좌 포스터가 붙어 있다. 그 위에도 듣고 싶은 프로그램이 보인다. 지방소도시 도서관이라 그런지 늘 넉넉한 열람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자리를 잡으러 서두르거나 자리를 찾아 헤맬 필요가 없어 느긋하고 여유롭다.


공부한다는 애가 필통을 안 가져왔다고 해서 문구점을 찾아 나섰다. 무인도에서 도구를 찾아 나선 기분이었는데 도서관 근처에 내가 고등학교 때 다녔던 문구점이 설마 그대로 있으려나, 하면서 가봤다. 간판도 건물도 그대로인데, 너무 정적이다. 하는 건가? 문 연 건가? 반신반의했는데 다행히 가게 문이 열려있었고, 부부로 보이는 중년 남녀가 있는 곳 가까이에 기다리고 있던 샤프를 샀다. 도구를 획득한 딸을 도서관에 넣어놓고 나는 또 다른 도구를 찾아 나섰다. 딸이 좋아하는 월남쌈을 해주기로 하고 다른 재료를 모두 샀는데 월남쌈에 버미셀리 누들이 없어 베트남 식료품점에 갔다. 주말이라 그런지 베트남 사람들이 꽤 모여 있었는데, 사지도 않을 거를 구경하면서 베트남 말을 음악처럼 듣다가 다시 도서관으로 돌아왔다. 딸은 새로 산 샤프에 샤프심을 넣고 문제집을 뒤적거리고 있고, 나는 옆에서 노트북을 켜고 끄적거리고 있다. 돌봄에서 잠시 빠져나온 것만으로 나는 조금 더 행복해졌다. 물론 그 사실이 엄마 때문에 조금 더 슬퍼졌다는 사실을 바꿀 수는 없지만 그래도 지금 이 순간은 내가 가장 행복한 거다.


처음 간병을 시작했을  아빠가 오전에, 내가 오후에 서로 교대로 외출하고 각자의 시간을 가졌다. 하지만 한동안 나는  나오지 못했다. 지난봄 치매약 부작용으로 엄마 상태가 많이 나빠졌고, 욕창이 생겨 방문간호사가 격일로 방문하게 됐다. 그동안 규칙적이었던 엄마의 루틴이 무너지고, 슬금슬금 더위와 장마가 습격하면서 모든 것이 뒤죽박죽 되었다. 그래도 농번기의 아빠는 새벽에 매일 나갔다 오곤 했지만 나는 나갈 타이밍을 찾지 못했다. 그래서인지 짜증은 날로 심해갔고, 때로는 엄마에게  자주는 아빠에게 화살이 돌아갔다: 우리 모두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하는 극심한 암흑기를 지나온 셈이다. 엄마는 계속  좋아지고 있지만 이제 겨우 자고 일어나는 시간의 리듬을 되찾았고, 나도 이제는 나갈  있는 타이밍을 찾았다.


이제 다시 집 나갈 궁리를 하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려서 집을 나갈 생각이다. 낮에 못 나가면 새벽에라도 나가고, 밤에라도 나가서 걸을 생각이다. 이 좋은 가을, 이 멋진 하늘 아래 어찌 집에만 있을 수 있을까. 지금 걷지 않으면 언제 걷는단 말인가. 간병인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잠깐씩이라도 돌봄의 대상, 돌봄의 공간에서 빠져나와 돌봄 업무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잠시라도 멀어지고 거리를 벌려두어야 다시 가까워질 수 있다. 그 거리와 시간이 없으면 돌봄의 고통은 내 살 속을 파고들 것이다. 나가자. 나가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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