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환자와 함께 사는 삶의 의미
와상환자를 돌보다 보면 회의가 드는 순간이 있다.
이 사람을 살려 두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무서운 생각이다. 하지만 먹고 자고 싸는 것 외에 다른 활동을 못하는 사람을 계속 보다 보면 삶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고민하게 된다. 아마도 요양원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나 중환자실에서 근무하는 사람이라면 한 번쯤 이런 생각을 해 보았을 것이다.
치매환자를 돌보다 보면 와상환자만큼은 아니지만 비슷한 수준의 회의가 드는 순간이 있다. 아무 의미 없는 고집을 부리는 어르신과 한참 실랑이를 한 이후나 심각한 문제가 반복되는 경우에 그렇다.
"도대체 이런 치매환자들을 이렇게 비용을 많이 들여서 돌보는 것이 맞아?"
살아있다는 것이 무언가 생산성이 있는 일을 한다는 의미는 아니다. 삶을 영위한 다는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이고 내가 살아 있는 이유를 찾는 것은 누군가 해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내가 타인의 살아가는 이유에 대해 고민을 하는 것은 상당히 주제넘은 짓임에는 틀림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은 내가 하는 일에 의미를 찾고 싶어 한다. 내가 하는 돌봄이 정말 의미가 있는 것일까에 대해 생각하다 보면, 결국 이 사람이 사는 이유는 무엇일까라는 고민에 다다르게 된다.
이 사회에 하등 도움도 되지 않고 피해만 주며, 다른 사람을 괴롭게만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이 사람을 계속 살리려면 상당한 돈이 든다. 이 사람을 살리는 데에 계속 돈을 써야 하는가? 이에 대한 정답은 물론 살려두어야 한다, 이다. 그것이 인본주의이고 이는 우리 사회의 근간을 이루고 있는 매우 중요한 가치이다.
치매환자를 돌보는 특수한 상황 속에서는 이 가치에 대해 의문을 제시하게 되는 것이다. 치매환자를 돌보는 삶은 정말 고통스럽다. 그 고통이 의미가 없다는 생각이 들면 이제 무서운 생각이 든다. 아마 어머니도 이렇게 자녀들에게 계속 피해 주면서 살고 싶어 하시진 않을 거야, 그러니까 돌아가시게 하자.라는 매우 섬뜩한 논리가 어느 순간 그럴싸하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돌보는 치매환자가 어떤 의미를 가지고 사는지에 대해 너무 깊게 고민하면 안 된다. 다시 생각해 보면 굳이 내가 고민할 필요가 없기도 하다.
치매환자가 살아가는 이유나 삶에 대해서는 상식적이고 긍정적인 측면에서 접근할 수 있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하기 위해 산다. 그러니까 하루하루를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살아가는 이유이다,라고 정의해 보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치매환자가 정말 행복해했는지 알기란 어렵다. 그래서 하루를 충실히 살 수 있게끔 만드는 것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 치매환자는 대부분 노인이고 어떻게 보면 이제 살날이 얼마 안 남은 사람들이기도 하다. 무언가 이룩하거나 무언가 남기기보다는 하루하루를 충실히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산성이 없고, 하루 종일 누군가를 괴롭혔다고 하더라도 충분히 무언가를 하며 하루를 보냈다면 의미가 있는 것이다.
또한 돌봄은 관계이다. 치매환자는 기억하지 못할 수 있지만 돌보는 사람은 내가 어떻게 돌보았는지 기억한다. 치매환자를 돌보는 내 행동 자체에서 적어도 돌보는 '나'는 그 의미를 찾을 수 있다. 어떤 분은 마지막 '추억'을 만든다고도 이야기한다. 내가 치매환자인 우리 어머니, 혹은 아버지와 시간을 보내며 평생을 기억할 수 있는 추억을 만드는 것이다.
사랑을 한다는 것은 참 감사하게도 사랑을 받는 사람뿐 아니라 사랑을 주는 사람도 행복하게 만들 수 있다. 그래서 치매환자를 돌보는 것은 나 스스로를 행복하게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내가 얼마나 힘들게 치매환자를 돌보았는지는 나 말고 아무도 모른다.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치매환자의 감사인사 같은 보상도 기대해서는 안된다. 그저 내가 충실하게 돌보았다, 그 사실 자체를 보상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