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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알시 Sep 23. 2023

지금보다 훨씬 더 잘 사는 나를 지운다

<불가사의한 소년>


날씨는 뜨겁고 술은 달았다. 속이 빈 초록 병 세 개를 쪼로록 세우고 네 개째를 주문했다. 동기 S와 둘이서만 한잔 하는 자리였다. 마주 앉은 S는 벌써 얼큰하니 기분이 좋아 보였다. S는 취하면 애교도, 말도, 궁금한 것도 많아졌다.   

  

"언니, 만약에 과거로 돌아가서 딱 한 가지만 고칠 수 있다면 언제로 돌아갈 거예요?"     


언니는 나보다 나이도 경험도 많으니까, 인생을 평가하는 더 현명한 기준이 있을 거 같아요!

어린 S는 종종 나에게 현자 같은 가르침을 기대하곤 했다. 그저 그녀보다 일찍 태어났단 이유로 거저 얻었을 뿐인 내 나이를 대단한 능력쯤으로 여겨주었다. 내심 그런 취급이 싫지 않았던 나는 그 기대에 보답하기 위해 멋진 답을 찾아 속으로 말을 골랐다.     



[불가사의한 소년]은 불로불사 정체불명의 소년이 등장해 인간들의 삶을 관찰하는 내용의 옴니버스 형식 만화다신에 가까운 능력을 가진 그는 인간들의 삶에 개입해 사건사고를 일으키며 인간들의 반응을 지켜보고 '인간다움은 무엇인가'를 탐구한다인간에 대한 그의 태도는 기본 냉소적이다여러 이야기 속에서 인간들은 그의 예상대로 잔인하고 이기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하지만때로 어떤 인간들은 이타적인 위대한 모습을 보여 그를 놀라게 하기도 한다.

내가 가장 인상 깊게 읽었던 이야기는 '스에츠구 가의 세 사람'이다     



후회와 미련의 화신인 나는, 원래 좀처럼 현실에만 집중하며 살지 못했다. 타고난 망상력을 십분 이용해 과거의 순간들이나 가상의 미래를 헤매며 살아왔다. 덕분에 내 인생의 웬만한 포인트마다, 다른 선택으로 다른 삶을 사는 새로운 버전의 내가 존재했다.      


미술을 시작하지 않은 나, 재수하지 않은 나, 내 모교가 아닌 여대에 입학한 나, 첫 직장을 그만두지 않은 나, 미술을 그만두지 않은 나, 공시에 도전하지 않고 취업을 선택한 나,

누군가와 만나지 않은 나, 누군가를 떠나지 않은 나, 누군가와 아직도 연락하는 나, 참지 않고 누군가와 싸운 나, 누군가를 결국 용서한 나 등등.     


이 다른 버전의 삶들은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어떤 방향으로든 실제 내가 살고 있는 지금의 삶보다는 '좋은' 삶이라는 것이다.     



4인 가족의 가장인 스에츠구는 회사의 구조조정으로 일자리를 잃는다자신의 존재가치를 유일하게 인정해 줬던 회사에 부정당했기에 스에츠구는 스스로가 쓸모없어졌다고 여겼다가치 없는 자신의 인생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해서 의욕을 잃고 게으르게 대충 살고자 마음먹는다.     


스에츠구 가의 장남으로 둔갑한 '소년'은 자포자기 생활 중인 아빠 스에츠구에게 키이치의 삶을 환상으로 보여준다환상 속 키이치는 죽을 고비를 넘겨 가며 험한 산을 힘들게 건너 집으로 돌아와 병으로 죽어가는 자식 사부로에게 구해 온 약을 먹인다아들을 살리기 위한 그의 고생을 지켜보던 스에츠구는 누군지도 모르는 키이치를 왠지 응원하게 된다.     



그 사건만 겪지 않았더라면, 그 사람만 만나지 않았더라면, 그런 트라우마만 생기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내가 이렇지 않을 텐데. 그 불순물 같은 순간들만 내 인생에서 싹 걷어내면 백 퍼센트 만족스러운 '현재'가 될 수 있다고, 지금보다 훨씬 좋은 삶을 살 거라고, 그렇게 믿어왔던 것 같다.      


S는 늘 나의 대학 시절을 궁금해했기 때문에, 그녀에게 '여대에 입학한 나' 버전의 바람을 들려주었다. S는 술에 취해 촉촉해진 눈을 빛내며 집중해 들어주었다. 호들갑 떨며 맞장구도 잘 쳐줬다. 어차피 죄다 허구인 이야기에 못난 한탄일 뿐인데, 이렇게 진심으로 들어주는 S가 나는 너무 기꺼워서 자꾸 말이 헤퍼졌다.      


"사회생활을 시작하면 더 이상 '친구'를 만들긴 어렵다고들 하잖아. 그런데 이렇게 대화할 수 있는 널 만나다니, 기적이라고 생각해."     



스에츠구는 아직 아내에게 실직을 고백하지 못했지만아내는 이미 눈치채 버린 건지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친정으로 떠났다스에츠구는 차라리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 혼자인 삶을 받아들였다새로 구직하거나 다시 가족에게 다가갈 의지도 보이지 않고 '인간은 결국 혼자'라며 가족을 포기해 버린다.     


혼자 생활에 익숙해질 무렵길을 걷다 우연히 소년을 만난 스에츠구는 계속 신경이 쓰였다며 키이치와 사부로의 이후 이야기를 묻는다. ‘소년은 다시 한번 환상을 보여준다사부로는 약을 먹고 살아나 스무 살에 결혼하여 다섯 명의 자식을 낳는다그중 차남 다이스케는 가문의 대를 잇기 위해 부모님이 정해주신 마을의 여자와 결혼하기로 한다마을 입구의 절에서 예비 아내를 만나기로 하여다이스케는 바람 부는 날 여자를 기다린다바람에 날린 흙이 눈에 들어가 눈을 비비는 그의 앞으로 예비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가 나타난다.     



안타깝게도 '여대에 입학한 나' 버전의 망상엔 '기적 같은 친구' S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망상 속에서 나는 실제 과거의 나보다 더 일찍 진로를 결정하고, 많은 인연의 도움을 받아 아예 다른 직업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S는 내가 2022년도에 지금 사는 도시의 공무원이 되었기 때문에 만난 인연이다. 지금 이 도시, 공무원, 2022년, 셋 중 한 개라도 어긋나면 아예 만나지 못하거나 지금과는 다른 관계로 만나게 됐을 것이다. 

그러니 S와 친구로 만나려면, 적성에 안 맞는 학과에서 버티느라 괴로웠던 대학 생활도 필수고, 진로도 정하지 않고 준비 없이 취직해 고생하며 방황했던 시간도 필수고, 공무원 시험에 몇 번씩 낙방하며 좌절했던 시간도 필수다. 게다가 전혀 관계없어 보이는, 싸우고 헤어지고 상처받았던 과거의 인간관계도 필수일 것이다. 이 인연의 소중함을 알아챌 만큼의 성숙함이 필요할 테니까.     



나타난 여자는 스에츠구의 아내 아이코와 똑 닮은 사람이었다스에츠구는 환상 속이라는 사실도 잊은 채로 애타게 아내를 부르다가 문득 깨닫는다다이스케 역시 자신과 꼭 닮았다는 것을여자는 다이스케의 눈에 들어간 흙을 깨끗한 손수건으로 닦아 빼내어 준다그 순간 다이스케는 여자에게 반했지만얼굴만 붉힐 뿐 돌아서 멀어져 가는 여자를 차마 쫓아가지 못한다스에츠구는 다이스케가 본인이라고 생각하고다이스케에게 아이코를 놓치지 말라고 소리치며 흥분한다여자를 데려오겠다며 따라나서는 스에츠구를 소년이 붙잡는다.     


여기서 두 사람이 맺어지면 지금의 아빠와 엄마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게 돼요.”     


소년은 말한다그녀는 엄마의 15대 위의 조상이고 다이스케는 아빠의 12대 위의 조상이라고여태 스에츠구가 지켜본 키이치사부로다이스케의 삶이 아주 조금이라도 어긋난다면 아빠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라고상상도 못 했던 전개에 넋이 나간 스에츠구에게 소년은 이어 말한다우리 조상의 삶뿐만 아니라온 인류온 지구온 우주의 역사 속에서 단 하나의 사건만 어긋나도 우리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며 이것은 곧우리가 가족이 되어 만났다는 사실이 셀 수도 없는 기적적인 확률의 결과라는 뜻이라고.     



현재의 삶 속에서 내가 소중히 여기고 좋아하는 요소들은 과거의 한 부분만 바뀌더라도, 도미노 블록을 넘긴 것처럼 와르르 사라져 버리고 만다. 생을 이루는 모든 요소가 겹겹이 맞물려 엉켜있어 한 부분만 깨끗이 도려낼 수는 없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모든 순간 다 제 역할이 있을 것이다.     


내 머릿속 다른 버전의 삶들이 어떤 방향으로든 지금의 삶보다 '무조건 좋다'는 생각은 대단한 착각이었다. 

아무래도 바꾸고 싶은 순간이나 후회되는 선택 같은 걸 자꾸 생각하기보다, 이미 누리고 있는 기적에 대해서 더 자주 생각하는 것이 좋겠다.      



스에츠구는 소년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지만 숙연하다그는 이미 헤어져 버린 우리 가족이 다시 만나기 위해서는 그렇게 엄청난 기적이 다시 필요한 거냐면서 낙담한다. ‘소년은 아빠가 한 발 앞으로 내딛기만 해도 확률은 백만 배로 늘어난다며 스에츠구를 격려한다.     


스에츠구는 마음을 고쳐먹고 새로 취직하여 열심히 살기 시작한다어느새 그의 곁에는 사랑하는 가족이 돌아와 있다이후 스에츠구는 세상 모든 일을 기적이라고 믿으며 매 순간을 소중하게 여기며 살아간다이제 행인으로 둔갑한 소년은 의욕 넘치는 태도로 변한 스에츠구를 멀리 지켜보며 모른 척 지나친다.     



취한 S를 먼저 집에 들여보내고 선선한 밤길을 걸어 집에 돌아왔다. 술기운에 잠시 잠들었다가 금세 깨버렸다. 다시 잠이 오길 기다리는 찰나에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 메모장을 켜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들을 쓰기 시작했다. 다음날 깨어나서도 잊어버리지 않도록.     


작고 아늑한 내 방, 

건강히 잘 지내는 가족들, 

자식 같은 사랑스러운 고양이, 

긴 세월 바뀌지 않을 직장, 

언제나 궁금하고 만나고 싶은 친구들, 

못 할거라 생각했지만 결국 하게 된 글쓰기, 

가끔 갖는 친구와의 즐거운 술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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