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알시 Aug 19. 2023

수정테이프 하나 가지고 싸우는 동기들을 자랑합니다

<사이키 쿠스오의 재난>


인류애가 소멸했다. 지구 따위 망해버렸으면. 내가 초능력자라면 지구는 이미 끝났다.     


시청에서 일하다 보면 종종 도저히 어쩔 도리가 없는 민원을 받기도 한다. 관공서에서 해줄 수 없는 일을 요구하면서 다짜고짜 화를 내는 경우다. 민원인은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으면 응대 중인 공무원 '개인'에게 분노의 화살을 돌리기도 한다. 그때부턴 본래의 문제 해결보다 자신의 ‘심기를 거스른’ 이 공무원을 어떻게든 벌주는 것으로 목적이 전도되는 것 같다.     


잘못 없이 한참을 민원인에게 욕먹다가 전화를 끊으면 이런 생각이 든다. ‘이게 다 내가 힘이 없어서 겪는 일일까.’ 애써 고르고 힘들게 얻어낸 내 직업은 사실은 참 힘없는 위치여서, 퇴직까지 긴 세월 내내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건지 막막해졌다.      


이런 때 대개는 동기들에게 대충 하소연하고 ‘이런 날도 있는 법이지’하며 적당히 털어버린다. 하지만 평소 잘만 먹던 음식에도 갑자기 단단히 체하는 날이 있듯이, 애써 웃어도 아무렇지 않은 척할 수 없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은 집에 가자마자 애니메이션을 틀었다. 부정적인 생각은 설산을 구르는 눈덩이 같아서 처음엔 작고 하찮아도 구를수록 크기를 키워 결국엔 마을 전체를 묻을 산사태가 되는 법이었다. 그러니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 않게 당장 눈앞에 자극을 줘 생각 자체를 멈춰버려야 했다.

이런 순간마다 내가 ‘긴급 처방’으로 보는 애니메이션이 있다.     



[사이키 쿠스오의 재앙]은 초능력을 가진 고교 2학년 소년이 주인공인 개그만화다. 황당할 정도로 엉뚱한 설정과 뒷이야기를 예상할 틈을 주지 않는 빠른 전개가 특징이다. 성우들의 익살스러운 목소리 연기도 아주 매력적이다.     


사이키 쿠스오는 독심술, 염력, 투시, 예지력, 순간이동, 사이코메트리 등등 모든 종류의 초능력을 가지고 있는, 거의 전능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의 위력은 단 3일 만에 전 지구를 멸망시킬 수 있는 정도라고 한다. 그럼에도 그는 본인이 가진 힘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다. 오히려 너무 많은 능력을 가진 탓에 성취감, 놀라움, 설렘 등 인생의 즐거움을 모두 빼앗겼다고 생각한다.

그의 유일한 소망은 누구에게도 주목받지 않고 평범하고 무난한 인생을 사는 것이다.     



‘긴급 처방’은 일시적 조치일 뿐 완전한 치료가 아니기에, 잠시 멈춰두었던 생각들은 다음 날 출근과 함께 되살아났다. 나는 어쩔 수 없이 오전 내내 심란한 상태로 일했다.

그때, 윈도우 작업표시줄에 주황색 블록이 깜빡거렸다. 사내 메신저 알림이었다.    

  

[알시야, S가 내 수정테이프 빌려 가서는 안 돌려주고 자기 거라고 한다. 애가 갈수록 밉상이야.]     


입사 동기 K, S가 함께 들어와 있는 채팅창이었다. K는 S의 잘못을 내게 이르면서 부러 S를 약 올렸다. K는 나보다 한 살이 많고, S는 나보다 일곱 살이 어렸다. 두 사람은 나이 차가 믿기지 않을 만큼 격 없이 지내는데, 매일 유치한 이유로 싸우다가 내게 일러바치며 서로 자기편을 들어 달라고 하는 게 일상이었다. 나는 여덟 살 차 오빠 동생의 싸움엔 무조건 나이 많은 쪽 잘못이라고 대개 S의 편을 들었다. 하지만 그날만큼은 그간 너무 편파적이었나 싶어 K의 편을 들었다.     


[S, 왜 말 한마디로 괜히 빚을 지고 그래?]     


K는 나의 지원에 더 기세등등하게 S를 놀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S는 말없이 이모티콘으로만 대꾸했다. 엇, 이거 혹시?     


멀리 S가 벌떡 일어나는 게 보였다. K의 자리로 쿵쿵 걸어가 딱 소리 나게 수정테이프를 내려놓았다.

아이쿠, S 삐졌다.      



사이키 쿠스오가 바라는 평범하고 조용한 생활은 좀체 이루어지지 않는다. 웬일인지 그의 곁에는 너무 눈에 띄는 개성 강한 친구들만 가득하고, 그들은 ‘재앙’ 같은 사고뭉치들이어서 매번 쿠스오까지 온갖 말썽에 휘말리게 만들기 때문이다.     


아무 생각이 없는 바보이기 때문에 쿠스오의 독심술이 통하지 않는 넨도, 자신이 마력을 봉인한 어둠의 용사라고 믿는 중2병 환자 카이도, 모든 상황을 열정으로 해결하는 열혈남 하이로, 모든 남자들을 반하게 만드는 초절정 미소녀이지만, 자신에게 반하지 않는 괘씸한 쿠스오에게 역으로 반해버린 테루하시, 돈과 먹을 것만 보면 초인으로 돌변하는 소녀가장 메라, 유명 폭주족 양아치 출신이라는 과거를 숨긴 쿠보야스.

쿠스오는 이 독특한 친구들을 귀찮아하면서 피해 다니지만, 막상 그들이 위기에 처하면 몰래 초능력으로 구해주곤 한다.     



“K오빠가 수정테이프 두 개나 갖고 있어서 한 개는 내가 전에 잃어버렸던 거 아니냐고 한 건데, 내 얘긴 들어보지도 않고 둘이 편 먹고 날 놀렸잖아요!”     


점심시간, 내가 살살 달래며 데리고 나온 S는 참았던 울분을 토했다. 아휴, 그랬어? 언니는 몰랐지잉! S를 다독이면서 귀엽다 싶기도 했지만, 대체 이럴 일인가 싶기도 했다. 수정테이프 하나로 이 난리라니, 이 웬수 같은 것들!      



K와 S의 첫인상은 각각 다른 의미로 강렬했다.

인사 사령 받던 날, 나와 나란히 섰던 K는 유독 땀을 흘리며 사극에나 나올법한 커다란 접부채를 연신 부쳐 댔다. 누군가 말을 걸면 버벅거리며 허둥지둥 대답했다. 대체 얼마나 긴장한 건지. 나 역시 긴장했지만, 바로 옆 사람이 너무 티 나게 긴장하니까 왠지 내 긴장이 풀리는 것 같았다. ‘이 사람, 벌써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금방 그만두는 거 아냐?’ 나는 속으로 그런 걱정을 했다.


코로나에 걸려 인사 사령에 오지 못했던 S는 이틀 뒤 출근했다. 꺾어질 것처럼 가냘프고 웃을 때 눈매가 사르르 접히는 꽃 같은 미인이었다. S는 말수가 적지만 강단이 있었다. 신규끼리 해야 하는 잔심부름을 나눌 때, 소심한 나와 K가 눈치를 보고 있으면 답답하다는 듯 단칼에 정리해 버렸다. 나는 S의 깔끔함이 좀 차갑게 느껴졌다. 그녀와는 나이 차도 있고 성격도 다른 것 같다고 생각했다. ‘아무래도 친해지기는 어렵지 않을까?’    


 

쿠스오의 세상은 해가 바뀌어도 시간이 흐르지 않아, 등장인물들은 계속 2학년 그대로다. 그 이유는 쿠스오가 일본을 전멸시킬 규모의 화산 분화를 막기 위해 매년 시간을 1년씩 되돌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초능력을 수련하면서 매년 화산 분화의 날을 기다린다. 분화가 시작되면 온 힘을 다해 화산을 억누르고, 도저히 버틸 수 없는 순간에 시간을 되돌려 내년을 기약하는 것이다.      


만화의 마지막에 쿠스오는 드디어 화산 분화를 막는 대업을 완성한다. 여섯 명의 분신을 만들어 내고 지구 밖으로 화산을 순간이동 시켜야 하는 어렵고 힘든 일이었다. 그러나 성공의 기쁨도 잠시, 하필이면 친구들에게 그 모습을 들켜 쿠스오는 초능력자라는 사실을 고백해야 할 위기를 맞는다.

친구라면 서로를 믿고 진실을 가르쳐달라고 닦달하는 친구들에게 쿠스오는 아직은 말할 수 없다며 끝내 고백하지 않는다. 곤란해진 쿠스오를 감싸주고 서운해하는 친구들을 설득한 것은 아무 생각 없는 줄 알았던 바보 넨도였다.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말하고 싶어질 때까지 기다릴게, 그게 친구잖아?”    


  

금방 그만둘까 걱정했던 K는 지금, 입사한 지 몇 달 만에 ‘친절 공무원상’ 등 온갖 상을 휩쓸고 있다. 그가 직업이 적성에 안 맞는다고 겸손 떨며 엄살을 부릴 때마다 S와 나는 ‘공무원을 하기 위해 태어난 남자’라고 놀려주고 있다.

새침하고 차가워 보여 친해지기 힘들 것 같던 S는 지금, 내 엉덩이를 때리고 도망가는 왈가닥 말괄량이가 되었다. 첫인상은 첫인상일 뿐, 소탈하고 나이에 비해 속이 깊은 녀석이었다. 7년의 나이 차는 홀랑 까먹은 우리는 동갑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다가, 가끔 서로의 나이를 떠올리면 새삼 깜짝 놀란다.     


K와 S, 두 사람과 함께 사고 치고, 위로하고, 놀리고, 감싸주며 많은 날을 지냈다. 겨우 1년도 채 안 되는 시간 동안 많은 추억이 생겼다.

점심시간엔 차에 모여 커피를 마시며 수다를 떨었다. 별 대단한 얘기도 아닌데 깔깔거리며 차가 흔들릴 만큼 웃었다. 셋이 함께 출장을 갈 때는 서로 ‘네가 운전하라’며 싸웠다.(셋 다 초보운전이다) 결론이 안 나 결국 택시를 타고 가면서 어이없어 웃었다. 과장님께 드릴 말씀이 있을 땐 서로 미루고 눈치만 보다가 다 같이 우루루 과장님 자리로 들어가곤 했다. 어리숙한 보고를 드리고 밖에 나와서 ‘우리 너무 바보 같다’며 웃었다. 누군가 축하할 일이 있으면 시청 앞 햄버거 가게에서 점심을 같이 먹었다. 얼마나 맛있게 먹었는지 소스가 앞머리에까지 묻어서, 닦으면서 한참을 웃었다.

셋이 함께 있으면 늘 웃었다. 모든 게 겁나고 서툰 시간이었지만 셋이 함께여서 즐거웠다.    


  

쿠스오는 다시 한번 시간을 하루 앞으로 돌린다. 그 때문에 또다시 화산 분화를 막아내야 했지만 친구들의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기꺼이 감수했다. 화산 분화를 막고 돌아온 쿠스오는 천재 과학지인 형 쿠스케가 만든 초능력 봉인 장치로 미련 없이 초능력을 없앤다. 다음날, 평범한 인간이 된 쿠스오는 드디어 친구들에게 초능력자였음을 고백하러 간다.


쿠스오가 친구들에게 초능력을 숨겼던 이유는, ‘초능력 때문에 친구들이 자신을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의심한 것이 아니었다. 초능력을 알아도 여전히 친구로 남아줄 그들을 알기 때문에, 그들에게 스트레스를 주지 않기 위함이었다. 몸도 마음도 꿰뚫어 보는 상대를 곁에 두고, 제 속이 다 읽혀도 참고 살겠다고 결심하는 것은 큰 부담일 테니까.

쿠스오는 ‘재앙’ 같은 친구들을 사실은 누구보다 소중하게 여기고 있었다.    

  


식사 후 오후 업무시간에 다시 메신저 알람이 번쩍거렸다.     


[S한테 그 수정테이프 선물로 줬어.]     


[오빠가 이름표까지 붙여서 줬어요! 이제 내 꺼! 헤헤]     


[그래! 해피엔딩이라 다행이야!]     


다행히 두 사람이 금세 화해한 모양이었다. 문제의 수정테이프를 K가 직접 S의 이름을 써서 선물했고, 진심으로 사과했다고 한다. 순수한 S는 금방 기분이 풀려서 한껏 신이 나 보였다. 다시 즐겁게 나누는 대화들로 주황색 메신저 알람이 경쾌한 리듬으로 번쩍번쩍 빛났다. 이렇게 금방 화해할 거면서, 맨날 별거 아닌 걸로 싸우고 그런다. 정말이지, 둘 다 너무 귀엽다.     


작게는 가족과 친구들의 위기를 수습하고, 크게는 지구의 멸망을 막아내야 했던 쿠스오. 큰 힘에 따르는 큰 책임에 지친 하루를 사는 그에게, 그래도 버텨낼 힘을 준 건 아이러니하게도 ‘재앙’ 같은 친구들이 아니었을까.

큰 힘도 큰 책임도 없는, 작은 톱니바퀴 같은 나도 동기들이 있기에 그런대로 버틸 만하다. 힘이 없어서 퇴직까지 내내 욕먹으며 일한다 해도, 이 친구들과 함께라면 괜찮을 것 같다. 새 직장, 낯선 환경에서 이런 친구들을 동기로 만날 수 있었던 내 운명에 감사한다.

이 책이 나오는 날, 아무래도 내가 햄버거를 쏴야겠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