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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문정아 Dec 25. 2023

온 마음을 다해 세상을 사랑했다

하나뿐인 우리 엄마처럼


  엄마.

  이젠 눈이 나빠서 내가 쓴 편지도 제대로 읽기 힘들지? 사춘기 때 엄마에게 종종 편지 써서 줬는데 그때마다 읽어달라고 그랬잖아. 내 목소리로 다시 한번 편지를 듣고 싶었을 텐데.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귀찮아했어. 엄마는 매년 생일 선물로 편지를 바랐는데 내가 너무 오래 약속을 지키지 못했네. 엄마는 별 내용도 없는 편지를 왜 그렇게 기다렸을까.


  나도 딱 한 번 엄마에게 편지 받은 적이 있었어. 그 당시에 초등학교 1학년이었던 나는 첫 문장을 보고 크게 실망했어. 내가 바라던 내용이 아니었으니까. 잘은 모르지만 죄책감 비슷한 감정이 들었거든. 엄마한테 사랑한다는 소리를 내내 듣고 싶었나 봐.


  아침에 눈을 뜨면 제일 먼저 '정아야 일어나야지...' 너무 미안하게 생각해.


  엄마는 나에게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은 순간에 제일 먼저 미안한 게 떠오른 거야. 아침잠이 많던 나는 엄마를 방 밖으로 자주 쫓아내 문을 쾅 닫았지. 엄마 혼자 초조하고 상처도 많이 받았을 거야. 투정 부리고 짜증 내던 옛날의 나를 한 대 쥐어박고 싶어.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마. 내가 잘못한 거야.


  요즘은 우리가 편지 대신에 수시로 통화하잖아. 저녁 예닐곱 시간쯤이면 엄마는 항상 잠에 취해 있어. 아마 일이 고되기 때문이겠지. 새벽 네 시에 일어나서 건설 현장에 나갈 준비를 하니까. 엄마는 어디 가서 노가다 한다고 말하지 말라 하지만, 나는 엄마가 전혀 부끄럽지 않아. 그치만 나이를 생각해서라도 김밥으로 저녁 때우는 건 그만해.


  엄마는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많아. 일 그만두고 반찬 가게도 열고, 뜨개방도 차려야 하니까. 손재주가 좋으니까 뭐든 잘 해낼 수 있어. 엄마가 좋아하는 거 할 수 있도록 내가 꼭 도와줄게. 가 보고 싶다던 롯데월드랑 63 빌딩도 다녀오자. 봄가을에 가면 구경거리도 많을 거야.


  일하는 몇 년 사이에 엄마는 보통 나이대보다 부쩍 노쇠해졌어. 나에겐 40대의 엄마 모습이 또렷한데 벌써 70대가 코앞이라니 믿기지 않아. 영원히 아줌마일 것 같던 엄마도 할머니가 된 거야. 엄마는 살면 얼마나 살겠냐고 나에게 입버릇처럼 말했지. 훗날 엄마가 세상을 떠나면 바다에 뿌려 자유롭게 해 달라고 말이야. 엄마, 우리 내일이 안 올지도 모른다고 미리 생각하지 말자. 미안하다고,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한 번 더 고백할 시간을 주자.


  집 안을 둘러보면 엄마의 흔적이 가득해. 코바늘로 떠 준 갈색 가방, 엄마가 아끼느라 쓰지 못한 비싼 이불 세트, 행운을 상징하는 부엉이 인형 같은 것들. 엄마는 언제나 가장 좋은 것을 내주지 못해 아쉬워했어. 나는 과연 엄마에게 그럴 수 있었을까. 엄마 생각을 몇 번이나 떠올렸을까. 부끄럽다.


  한번은 엄마 생일날, 큰 마음먹고 캐시미어 머플러를 샀는데 겨울에 두른 걸 본 적이 없어서 마음에 안 드나 했지. 분명히 엄마가 좋아하는 은은한 분홍색이었는데. 그런데 그게 엄마 집 장롱에 포장 박스 그대로 담겨 있는 거야. 내가 안 쓸 거면 환불해 버린다고(나, 진짜 못됐다) 씩씩대니까 엄마는 좋은 날에 꺼내려 한다며 도로 넣어뒀어.


  지금처럼 얇은 손수건으로 아무리 목을 감아봤자 하나도 안 따뜻해. 언제는 목에 찬바람이 안 들어야 몸도 건강하다며. 엄마가 목도리를 두르고 나가서 주변 사람들한테 자랑도 좀 하고 양손 가득 장 보고 포근하게 집으로 돌아오는 거, 그런 날이 엄마도 나도 좋은 날이야.


  36세 우리 엄마는 작디작은 내 생명이 곧 찾아올 줄 알았을까. 늦둥이였던 나를 무사히 품어줘서 고마워. 엄마가 나를 가졌을 때 아몬드 초콜릿을 엄청 먹었다고 들었어. 나는 뱃속에서 질리게 먹은 탓인지 지금은 초코 맛을 별로 안 좋아해. 그래도 엄마 주려고 사는 초콜릿은 좋아. 엄마가 그 시절에 느꼈던 기분을 돌려줄 수 있어 다행이야. 엄마는 열 달 동안 온 마음을 다해 세상을 사랑했을 거야. 그런데 내가 그 마음을 자꾸만 까먹게 돼. 남들은 하지 않을 나쁜 상상을 자주 하고 있어. 이러려고 태어난 게 아닌데. 정말 미안해.


  삶을 그만 놔 버리고 싶을 때 가장 마음에 걸리는 사람은 엄마야. 예전 그때처럼 나한테 미안해할까 봐. 잠든 나를 깨우던 당신의 행동을 후회할까 봐. 나의 죽음이 엄마의 잘못으로 치부될까 봐 못 죽겠어. 엄마까지 죄책감에 괴로워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야. 여전한 엄마의 사랑으로 아직 버티고 있어. 엄마가 업어주고 안아주던 그 온기가 참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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