묻다

질문, 은폐, 사라짐, 더러움

by Pink Brown

나는 잘 묻는다.

무엇이든 잘 묻는다. 남에게 묻기도 하고, 파묻기도 하고, 옷에 묻히기도 한다. 그래서 다양한 의견을 듣고, 삽질도 잘하고, 부분 빨래도 잘한다. 왜일까? 하나하나 살펴보자면 다음과 같다.


나는 Facilitator이다. 어떤 일을 해 나갈 때 다양한 사람들의 집단 지성을 한데 모아 시너지를 내는 작업을 사뭇 잘해 낸다. 이때 나를 위한, 그리고 참여자들을 위한 이해의 정도와 속도는 얼마나 적합한 질문을 하느냐에 달려있다. 아무리 해당 직무 전문가라도 해도, 한강의 어디서부터 물을 길어 올려야 할지 모르듯이, 질문 없이 그저 아는 것을 읊어대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나는 핵심적인 질문을 잘하고, 다른 사람에게서 필요한 질문을 끄집어내는 질문도 잘한다. 물론 많은 연습과 경험이 바탕이 되었지만, 조금 타고난 것도 있는 듯하다. 한국인들은 꼬치꼬치 캐묻는 것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아무래도 Context-based 문화권이다 보니 척하면 척 알아듣는 것이 미덕인 것으로 알고 살아와서 그러는 것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척하면 척이 아닐 때가 생각보다 많이 존재한다. 으레 그럴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것이, 실제로 답을 들어보면 전혀 예측하지 못했던 답일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꼬치꼬치 묻는다. 취조당한다고 느껴지지 않게 어조와 문장, 표정과 제스처를 적절히 사용한다. 웃으면서 돌직구를 던지는 스타일이랄까. 웃는 얼굴에 침을 뱉지는 못하는 법이니까.


나는 잘 묻는다. 웬만한 일은 그냥 묻는다. 물론 반드시 해결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대립과 갈등도 불사하지만, 그렇게 중요하지 않는 것들은 가급적 그저 지나간다. 나 혼자 삭히는 경우도 많다. 이런 경우는 마음속에 묻는 것이 될 것이다. 누구나 머리 또는 마음에 커다란 항아리가 묻혀있다고 생각한다. 항아리에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또는 기억하기 싫은, 또는 말해봤자 소용없는 것들을 하나 둘 던져 넣는다. 그 안에서 그 거무스름한 것들은 섞이고 응축되고 더욱 독한 것으로 변해간다. 항아리 크기에 따라 달라지겠지만, 그 무시무시한 것들이 항아리에 차고 넘치게 되면 독기에 마음이 상한다. 마음이 너무 많이 상하기 전에 또 다른 항아리를 파묻고, 그쪽으로 넘치는 것을 옮겨야 한다. 독기에 장기적으로 방치된 마음은 무감각해지거나 너무 예민해져서 외부 자극에 정상적으로 반응하지 못한다. 나의 경우에는 응축을 엄청나게 효율적으로 하는 바람에 독기가 아주 극강에 이르러 있다. 그래서 가급적 항아리를 쳐다보지 않는다. 보기만 해도 그 기운에 눈이 타버릴지도 모른다. 마음 아주 구석진 곳으로 몰아놓고 뚜껑도 엄청 무거운 것으로 눌러놓은 다음 안 보이는 척 삶을 살아간다. 조금씩 삐져나오고 있는 것들은 무의식적으로 나의 마음을 상하게 만들지만, 아직은 통제 가능한 수준이다. 너무 잘 묻어도 탈이다. 적당히 묻고, 적당히 흘러나와야, 적당히 치우고, 적당히 비워낼 텐데. 이건 나의 영원한 숙제가 될 것이다.


나는 잘 묻힌다. 뭘 먹으면 꼭 하나씩 흘린다. 원래 잘 안 흘리는 타입이었는데, 나이를 먹고, 약을 먹고부터 손이 조금씩 떨린다. 나도 몰랐는데, 내가 떨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도 아주 가늘게 떨고 있다고 아이들이 알려줬다. 그래서 자주 흘린다. 조금만 방심하면 예외가 없다. 그렇게 떨군 자리에는 얼룩이 남는다. 물과 티슈 등을 이용해서 얼룩을 최대한 빼낸다. (옷감이 상하지 않게 조심조심) 그리고 집에 가서 비누나 샴푸 등으로 부분 빨래를 한다. 대부분의 경우에는 그렇게 하면 지워지지만 아주 가끔, 그렇게 해도 얼룩이 남는 경우도 있다. 속상하다. 그럴 때는 내가 뭘 묻혔다는 사실을 항아리에 묻는다. 그리고 나에게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지? 나는 대답한다. 별거 아니야. 하지만 나는 정확하게 알고 있다. 이렇게 한다고 얼룩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하지만 최대한 묻어보기로 한다. 어쩔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을 때가 있는 법이니까.


keyword
이전 17화소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