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리

내리는 것, 서늘함, 몰래 훔치는 것, 어딘가의 지명 유래

by Pink Brown

상강이다. 첫서리가 내린다는 절기이다. 10월답지 않은 날씨가 계속되다 상강이 있는 금주부터 급속하게 원래 기온으로 돌아갔다. 정말 신기한 일이다. 비록 서울에는 서리가 내리지는 않았지만, 산간지방이나 지방에 인공열이 별로 없는 지역에서는 내리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아, 서리가 왜 내리는지 아는 사람이 있을까? 혹시 직접 경험해 본 사람은? 이슬도 내린다고 표현한다. 이슬이 맺힌다는 것은 본 적이 있지만 이슬이 내리는 걸 보거나 경험해 본 적이 있다. 아주아주 시골에 가면 서늘한 여름의 이른 아침 시간에 분명히 비는 아닌데 비처럼 수분이 스르르 내린다. 우산이 필요할 정도로 내릴 때도 있다. 이슬은 옷을 시나브로 적신다. 그래서 새벽 밭일을 하고 돌아온 아버지의 잠방이가 축축했다는 소설 문구가 있을 수 있을 것이다. 서리도 마찬가지다. 이슬이 추운 기온에 어는 형태로 바뀐 것이 서리이니까. 서리는 맺히기도 하지만 가끔 내리기도 한다. 물론 얼음에 가까운 형태이기 때문에 아마도 아주 가는 눈이 내리는 것 같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서리가 내릴 정도로 추운 날은 이른 아침에 밖에 나갈 일이 없는 법이니 추측만 할 뿐이다) 아직 추수할 때가 되지 않은 작물 위로 서리가 하얗게 내린다. Frosted. 반짝반짝 빛이 날 것이다. 크리스마스 오너먼트처럼 예쁘겠지만 농부들 입장에서 좋을지는 잘 모르겠다. 아마 서리가 내리면 안 되는 작물들은 비닐하우스 안에 들어가 있겠지. 그에 반해 아침에 서리를 맞고 낮에 따가운 가을 햇살을 맞으면 더 맛있어지는 작물들도 있을 것이다. 무엇이든 좋은 점도 있으면 나쁜 점도 있고, 유리한 포인트가 있으면, 불리한 포인트도 있다. 장점만 있는 것은 거의 찾기 어렵다는 점에서 신은 공평한 듯도 하다.


위에서 하강하는, 내리는 서리가 있는가 하면 옆에서 빼가는 서리도 있다. 주로 여름에 많이 일어나는, 작물을 한두 개 몰래 훔쳐가는 서리이다. 요즘에는 그런 일이 잘 일어나지 않지만 (가져갈 거면 아예 밭을 통째로 털어가는 경우는 있어도 한두 개 훔치는 일은 별로 없는 듯하다) 내가 어릴 적에만 해도 여름에는 수박 서리, 참외 서리, 토마토 서리 등이 있었다고 들었다. 낮밤 관계없이 지나가다 배가 출출하면 옆에 있는 남의 밭에서 한두 개 꺾어서 먹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범죄이다. 작지만 절도는 절도이니까. 하지만 그 옛날에는 상습적이지만 않으면 묵인하고 넘어갔다. 다들 아는 이웃이 한두 개 먹는다고 큰일이 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자꾸만 서리를 해대서 밭 한쪽에서부터 작물이 싸복싸복 없어지면 당연히 잡아서 벌을 줘야 하겠지만, 한두 개쯤이야. 그 정도는 주인 입장에서는 정이었고 서리하는 자 입장에서는 스릴 넘치는 유희였다. 나도 아주 어릴 적 시골 외가댁에 놀러 갔을 때, 언제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외삼촌의 꼬드김에 넘어가서 남의 밭에 서리를 하러 나선 적이 있었다.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시도만 하고 진짜 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그날의 훤한 달빛, 밭을 찾아 나서던 발걸음과 공기, 알 수 없는 길을 걸어가던 생소함과 두근거림은 기억에 어렴풋이 남아있다. 확실히 스릴 넘치는 모험이었던 것은 틀림없다.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오는 단편적인 기억이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서리풀 공원을 걷는다. 서리풀은 서초의 옛 지명 이름이라고 한다. 상서롭다는 뜻을 지닌 서리와 풀을 뜻하는 풀, 합쳐져서 상서로운 풀. 이는 농경사회였던 옛날에 벼를 지칭하는 것이었다고 한다. 그 옛적에는 이곳이 논이었던 것일 테다. (잠실은 뽕밭이어서 누에를 많이 쳤기 때문에 잠실이라는 지명이 붙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상서로운 서리 풀밭이었던 곳을 걸으며 내리는 서리와 빼가는 서리를 생각한다. 아, 단풍이 떨어진다. 아주아주 짧은 가을이 이렇게 갑자기 왔다가 지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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