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탈, 면

같은 말, 같은 단어, 다양한 의미로 빚어낸 이야기 2

by Pink Brown

안개가 자욱한 날이었다. 자칫 비행기 한 대가 착륙을 못 할 뻔했지만, 다행히 안개가 더 자욱해지기 전에 무사히 착륙할 수 있었다. 공항 도착 출구에 나타난 그녀는 한 손에는 캐리어를, 한 손에는 작은 케이스를 들고 주변을 돌아보지도 않은 채 무작정 앞에 있는 공항 밖 게이트로 나아갔다. 그녀는 바로 앞에 예약이라는 초록색 글자를 켜고 대기하고 있던 택시에 서둘러 탑승했다. 긴 비행 시간에, 착륙 지연에, 지난한 입국 과정을 거친 그녀는 매우 지쳐있었다. 이 추운 날, 지친 몸으로 차가운 가죽 시트 위에 앉아있다 보니 따뜻한 차 한 잔이 절실해졌다. 하지만 달리는 차 안에 있는 지금, 어디서 뜨거운 차를 구한단 말인가. 그녀는 얼굴 표정 하나 바뀌지 않은 채로 멍하니 앞을 응시하며 차가 목적지에 빨리 다다르기를 바라고 있었다. 갑자기 차가 급 브레이크를 밟았고, 앞으로 몸이 쏠리는 와중에도 그녀는 옆에 놓아둔 작은 케이스가 떨어지지 않게 손으로 잡았다. 택시 기사가 나직이 욕을 내뱉는 소리가 들려왔다. 멍하게 있던 그녀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리고 그 케이스. 손에 닿는 감촉이 유난히 서늘한 케이스가 갑자기 그녀의 의식 위로 불쑥 들어와, 그 공간을 가득 채웠다. 그래, 이것 때문에 내가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거지. 망가지진 않았겠지? 한번 확인만 해볼까. 그녀는 케이스를 열고 통기성 좋은 거즈 커버를 옆으로 젖혔다. 그 안에는 매우 독특하고 어딘지 모르게 기괴한 느낌을 주는 탈이 들어있었다. 나무에 칠을 한 모양의 탈 주변에는 각종 장식이 달려있었고, 그래서 조금만 힘을 줘도 마치 장식이 떨어지는 탈이 날 것만 같은 위태로움을 담고 있었다. 앞뒤로 살살 탈을 살펴보던 그녀는 아무 이상이 없다는 생각에 미치자 안도의 한숨을 쉬며 탈을 내려놓았다. 아니, 내려놓으려 했다. 어쩐지 탈이 손에 착 감기는 느낌이었다. 탈 내부의 향을 맡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무 향일까? 아니, 희미하게 흘러나오는 향은 단순한 나무 향은 아니었다. 아무리 못해도 족히 50년은 넘은 탈인데, 향긋한 나무 향이 날 리가 없지 않은가. 알 수 없는 아주 미미한 향에 이끌러 그녀는 얼굴 앞으로 탈을 점점 가까이 가져갔다. 조금 짭조름하면서 흙냄새인 것 같기도 하고, 절에서 피어오르는 향 냄새 같은 향이 뒤섞여 있었다. 조금 더 진한 향을 맡고 싶어 점점 더 가까이 얼굴을 가져가던 그녀는 탈의 눈구멍 밖으로 보이는 모양에 시선이 붙잡혔다. 아니야, 더 이상 가까이 가져가면 안 돼. 무언가 탈이 날 거야. 어디선가 경고의 말이 의식 한 구석에서 들려왔다. 거의 보물급에 해당하는 문화재를 함부로 다루면 안 된다는 것은 도슨트들의 기본 상식이었다. 하지만 저 시선. 그녀의 눈을 붙잡아버린 탈의 눈구멍 너머로 보이는 저 시선. 그녀는 도저히 그 시선에서 눈을 뗼 수 없었다. 눈을 떼면 영영 사라질 것만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더 이상 가까이 대면 안 돼. 그녀는 가까스로 탈에서 코를 들고 탈을 다시 거즈면 아래로 집어넣었다. 하지만 그 시선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그녀의 시선 앞에 머물렀다. 머리가 어지럽고 시야가 부예졌다. 결국 참지 못한 그녀는 거즈면을 들고 다시 탈을 바라보았다. 이상하게 인상이 조금 바뀐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리가 있나. 스스로 너무 피곤해서 그런 것이라고 치부하고는 어딘지 모르게 으스스한 느낌에 휩싸여 그녀는 거즈면 커버를 도로 덮었다. 그때 택시 기사가 환기를 위해 앞 창문을 열었고, 그 바람에 거즈면이 바람에 훅 날려 탈이 다시 드러났다. 분명하다. 탈의 인상이 바뀌었다. 그리고 이제는 멀리서도 눈구멍 안에 그 시선이 보였다. 그녀는 탈에서 눈을 뗼 수 없었다. 눈을 돌리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그녀는 그녀 옆에서 그녀를 쳐다보는 듯한 느낌으로 자신이 하는 행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늘게 떨리는 손으로 탈을 잡는다. 탈의 안면이 보이게 탈을 뒤집는다. 점점 얼굴 가까이 탈을 가져간다. 그녀는 안달이 나 있었다. 탈의 안쪽 면과 얼굴의 면이 닿는 느낌이 미치도록 궁금했다. 왜 안달이 나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저 그 시선, 눈구멍 안의 시선에 사로잡힌 채, 그 시선을 직면하고 싶다는 생각이 그녀를 온전히 지배하고 있었다. 면과 면이 닿으면 그 시선을 온전히 파악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녀의 안면과 탈의 안 면 사이의 거리가 점점 좁아지고 있었다. 그녀를 관찰하듯 바라보고 있는 그녀는 탈을 가까이 대서는 안된다는 경고를 끊임없이 보내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탈은 점점 더 가까워지고 거의 얼굴에 직면한 수준까지 다가와 있었다. 행선지를 확실히 하기 위해 택시 기사가 백미러로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엄청난 비명소리가 그녀의 귀 안으로 뚫고 들어왔다. 그 소리에 그녀는 마치 최면에서 풀린 듯 정신을 차리고 탈을 도로 케이스에 넣었다. 거의 던져 넣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택시 기사는 더욱더 고함을 질러대기 시작했다. 거의 정신이 나간 것처럼 보였다. 접촉 사고의 고비를 넘기고 겨우 갓길에 택시를 댄 기사는 혼비백산한 상태였다. 그의 면상이 하얗게 질렸고, 눈은 공포에 격렬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녀는 비명 소리에 제대로 생각할 수가 없었다. 왜지? 갑자기 미쳐버렸나? 그때 까맣게 변해버린 자신의 손 끝이 눈에 들어왔다. 탈에 닿았던 손가락이 새카맣게 변해 있었다. 탈이 이렇게 더러웠었나? 그녀는 의아하면서도 지속되는 비명 소리에 생각을 정리할 수가 없었다. 택시 기사는 결국 졸도해 버렸고, 그녀는 비명 소리로부터 해방되었지만 여전히 알 수 없었다. 왜지? 손가락을 옷자락에 문질러보았다. 까만색은 전혀 연해 지지 않았다. 오히려 옷자락에서인지, 손가락에서인지 까만 재가 피어올랐다. 재가... 피어올라...?? 그녀는 갑자기 자신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왠지 손을 대면 안 될 거 같아, 택시 백미러를 통해 얼굴을 살펴보기로 했다. 잘 보이는 각도로 몸을 움직이던 그녀의 눈 끝에 무언가 검고 붉은 형상이 비쳐 들어왔다. 그녀는 갑자기 눈을 꼭 감았다. 아니야, 아니겠지. 서서히 천천히 눈을 뜨던 그녀는 그만 말문이 막힌 채 온몸이 굳어졌다. 끊기듯 새어 나오는 꺽꺽 소리 만이 그녀의 목구멍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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