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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Rabbin Chang Jul 23. 2021

스프린트(SPRINT)

Ep.8: 스프린트(SPRINT)


김필립은 아침에 일어나 어제 정리했던 친구들과의 대화 내용과 밤늦게까지 주고받은 메시지들을 다시 살펴보았다. 여기저기 꽤 많이 물어보았지만, 의외로 의견이 많이 갈리지 않고 간단히 정리된 것이 마음에 쏙 들었다.



가만히 살펴보니, 20대 남자 소비자들은 옷이나 운동용품 등의 브랜드가 상당히 중요하게 작용하는 듯했다. 상대적으로 여자들은 옷에 대해서라면 브랜드에 관대한 편인 느낌이 들었다.


‘브랜드를 만드는 건 어려운 느낌이 들어. 내가 갑자기 나이키를 이길 수는 없지 않나...? 그런데 20대 여자 옷도 허들이 만만치 않단 말이지. ‘맘에 들면 브랜드는 상관없다’라는 말은 결국 맘에 딱 들어야 하는 거잖아. 그런 센스면 상당히 수준 높은 디자이너가 필요할 텐데...?’


결국 김필립이 보기에는 여성 운동복, 그중에서도 요가복이 그나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있어 보였다. 브랜드도 중요하지 않고, 기능성도 많이 요구되지 않고. 그렇다면 자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그러면 남들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남들도 다 할 수 있을 것 같다는 데 생각이 미친 김필립은 일단 인터넷을 뒤져보기 시작했다. 아니나 다를까, 정말 많은 업체에서 다양한 요가복을 내놓고 있었다. 요가에 전혀 관심이 없었기 때문인지 처음 듣는 브랜드도 많았다. 요즘 트렌드나 통계자료도 이것저것 살펴보자 요가나 홈트레이닝 붐이 일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였다. 그리고 그 붐을 타고 많은 업체들이 시장에 뛰어드는지 창업 이력이 짧은 브랜드가 많았다. 인터넷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생각한 김필립은 스포츠용품을 모아서 팔고 있는 쇼핑센터로 나갔다. 요가복과 요가용품을 모아 둔 곳은 물론, 나온 김에 축구용품, 야구용품 등 요가복이 아닌 곳도 다 한번 돌아본 김필립은 확실한 깨달음을 느꼈다.


‘확실히 축구나 야구는 옷이나 장비도 메이저 브랜드들 밖에 없는데, 요가는 처음 보는 브랜드도 많고 브랜드가 없는 상품도 많이 있군...’


한 바퀴 점포를 둘러본 후 쇼핑센터 안에 있는 커피숍에 자리 잡은 김필립은 지난번에 쓰다 만 스왓과 4C를 꺼내놓고 정리를 시작했다.



지금까지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하고 나자, 그럴싸한 분석이 나오기 시작했다. 먼저 4C 쪽의 고객과 그 고객의 니즈가 특정되자 상품이 명확해지고, 그에 따라 경쟁사들이 제공하고 있는 것이 확실해졌다. 그러자 김필립이 제공해야 할 ‘소비자가 요구하는데 경쟁사는 제공하지 않는 것’도 보이기 시작했다. 4C의 정리를 끝내고 다시 스왓을 바라보자, 비즈니스 센스 같이 아무래도 좋을 얘기는 빠지고 내가 힘을 쏟아야 하는, 이제 강점이 되어야 하는 부분이 뚜렷해지기 시작했다. 또한 요가나 홈트레이닝이 유행하고 있다는 것을 외부요인 중 기회 칸에 적어놓고 나니 더더욱 자신이 생각한 이야기가 말이 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약점을 어떻게 최소화해야 하는지, 혹은 자신이 써놓은 약점들이 맞긴 하는 건지 확 와닿지 않았다. 자본이 적은 것은 어떻게 커버하지? 위협과 약점에 관해서는 이대로 좋은 것인지 확신이 없었지만, 어찌 됐든 일단 숙제를 완성했다는 마음에 뿌듯해졌다.


‘아라 누나, 숙제 완료했음. 시간 될 때 연락 줘요!’


며칠 후 저녁, 동네 바. 김필립은 약속시간보다 일찍 도착해, 이미 맥주를 마시며 바텐더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아, 그래 가지고요, 이게 제가 비즈니스 감각이란 게 좋아서 말이죠, 그래서 제가 동물적인 감각으로 요가복이다! 딱 이런 감이라는 게 왔다 이거란 말이죠!”

“자네 오늘 기분이 꽤 좋구먼? 이렇게 신난 건 처음인 거 같아?”

“하하, 제가 숙제를 좀 잘한 것 같아서요.”

“그래? 오늘 또 그 똑똑한 아가씨가 오시는 건가? 아, 저기 오셨네. 어서 오세요!”

“어, 아라 누나 어서 와!”

“뭐가 벌써 이렇게 뜨거워? 숙제 잘했나 보네? 사장님, 오랜만이에요.”


짧은 인사와 그간의 얘기가 오갔다. 김필립은 자기가 어떻게 장아라가 내준 숙제를 완성할 수 있었는지 이런저런 설명을 붙여가며 이야기했다. 특히 친구들에게 이것저것을 물어본 이야기에 장아라는 눈을 빛내며 흥미로워했다. 김필립이 적어놓은 스왓 분석과 4C를 주의 깊게 살펴보며 장아라는 김필립에게 말했다.


“생각보다 아주 잘했는걸? 그래, 감상은?”

“감상?”

“네가 생각했을 때 어떤 걸 잘한 것 같고, 어떤 걸 못한 것 같고, 이런 걸 더 보완했으면 좋겠고. 큰 회사들이 프로젝트가 끝나면 하는 질문, 기억 안 나?”

“아... 그거...! 혼자도 하는 거였어?”

“당연하지. 이 모든 것은 네가 생각하는 방식을 훈련하기 위한 거야. 마케팅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비즈니스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김필립은 곰곰이 자신이 잘한 점과 잘못한 점, 그리고 앞으로 보완하고 싶은 점들을 생각했다. 좀처럼 쉽게 생각이 나질 않았다. 한참 동안 자기가 해온 것을 바라보는 김필립에게 장아라가 얘기했다.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아도 돼. 그냥 가볍게 얘기해 보라고.”

“어… 어, 그래. 먼저… 소비자들, 그러니까 친구들에게 물어본 것은 잘한 것 같아. 그래서 내용을 구체적으로 만들 수 있었거든. 그리고… 잘못한 점이랄까, 어떻게 해야 약점 하고 위협을 최소화할 수 있을지 생각이 잘 안 났어. 잘못했다기보다는 능력이 안 돼… 그래서 지금부터 그걸 보완했으면 하는데.”


장아라는 싱긋 웃으면서 김필립을 바라보았다.


“잘했어. 아니, 아주 잘했어. 하하. 그렇게 하는 거라고. 이제 어엿하게 신입사원 정도는 된 거 같은데?”

“아… 하하하… 고맙습니다~”

“문제는, 너는 신입사원이 아니라 사장이 돼야 하는 거겠지만 말이야.”

“아, 누나, 좀! 놀리지 말고! 안 그래도 프레셔 장난 아닌데!”

“큭큭… 그래. 아무튼. 그럼 내가 피드백을 할게. 일단 방금 말한 것처럼, 아주 잘했어. 정말 기대 이상이야. 특히 무엇이 그러냐 하면, 네가 알아서 친구들에게 무언가 물어본 점.”

“어… 역시 그래서 얘기가 구체화되기 시작했으니까.”

“아니, 그보다 두 가지 점에서 그걸 칭찬할 이유가 있어. 첫째, 네가 한 것은 일종의 마켓 리서치야. 마케팅 적으로 유효한 수단이고, 너는 네가 그걸 한 지도 몰랐겠지만 어찌어찌 그런 방식을 잘 활용했지. 둘째, 사실은 이걸 더 칭찬하고 싶은데 말이지, 그 행동은 네가 소비자 중심적인 생각을 했기 때문에 나온 거야. 물론 사장님이나 내가 고객을 먼저 생각하라는 힌트를 줬지만, 정말로 고객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리서치까지 가진 않았겠지. 처음에도 얘기했지만,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건 고객이야.”

“마케팅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고객…”

“그거 알아? 대기업에는 정말 많은 부서가 있어. 재무, 법무, 인사, 홍보, 공보, 영업, 생산, 생산관리, 조달, 총무. 부서명만 외우는 데도 한나절은 걸릴 거야. 그런데 그 수많은 부서 중에서 고객을 대변해서 회사에 고객의 니즈를 얘기하는 부서는 오로지 마케팅 부서 하나뿐이야. 그 모든 부서들이 고객 때문에 먹고살지만, 고객의 입이 되는 부서는 마케팅 하나라고. 네가 고객을 잊는 순간, 그 커다란 회사가 고객을 잊게 되는 거야. 그러니 고객을 생각하자는 건 그저 아름다운 미담 같은 게 아니야. 마케팅 팀의 프로페셔널한 의무이지. 고객의 입장을 대신해서 다른 모든 부서를 설득하지 않으면 안 돼. 그걸 소홀히 하는 순간 프로가 아닌 거야.”

“누나, 뭔가 비장하고 멋있다…”

“생각보다 비장하지도 멋지지도 않단다. 말이 샜는데 아무튼 그래. 그리고 또 한 가지, 너 블루보틀 커피 알지?”

“어휴, 엄청 유명한 데잖아. 실리콘밸리의 커피.”

“하하, 맞아. 잘 아네. 사실 마케팅 리서치는 시간도 오래 걸리고 돈도 많이 들어. 네가 한 방식은 전통적인 마케팅 리서치의 관점에서 보면 엉망진창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 표본집단 선정이나 질문을 이끄는 방식이나 하나도 프로페셔널한 방식이 아니야. 그런데.”

“그런데?”

“바로 블루보틀 커피가 그런 방식으로 성공했단 말이지. 구글 벤처의 지원을 받아서, 히토츠바시 경영대학원의 노나카 이쿠지로(Ikujiro, Nonaka) 교수와 하버드 비즈니스 스쿨의 타케우치 히로타카(Hirotaka, Takeuchi) 교수가 제안한 스크럼(SCRUM) 모델이 바탕이 된 스프린트(SPRINT)를 활용해 성공한 유명한 린 스타트업 (Lean Start-up) 케이스야. ‘’

“노나 뭐가 뭐? 스프린트?”

“하하, 그래. 어려운 말이 많지? 린 스타트업이라는 건 말 그대로 ‘가볍게 시작한다’는 의미야. 아직 작은 기업이니까 바로바로 피드백을 받아서 바로바로 움직인다는 거지. 스프린트라는 건 그냥 이름이니 외울 필요는 없지만 결국 아무리 엉터리 서베이라도 ‘고객의 피드백을 개발 단계에서 어떤 형태로든 듣는다’는 개념이야. ‘한번 시험해 보고, 아니면 바꾸면 되지’라는 마인드랄까?”

“어… 잠깐, 아직 이해가 잘 안 되는데?”

“음… 그러니까 예를 들어, 블루보틀에서 웹사이트를 이런 식으로 만드는 게 좋을까, 저런 식으로 만드는 게 좋을까 하고 후보 1,2,3이 나왔다고 해보자. 그러면 예전 같으면 돈 많은 대기업은 예산 왕창 들여서 서베이를 돌리고, 돈 없는 중소기업이면 그냥 마케팅 부서에서 알아서 정하든지 사장 맘에 드는 걸로 하든지 했단 말이지. 블루보틀은 그냥 대충 스케치북 같은 데 그려서 길거리로 들고나가 커피 마시는 사람들한테 제일 맘에 드는 게 뭐냐고 물어본 거야. 그렇게 투표를 해서 제일 호평인 것을 골라 거기에 소비자 의견을 반영해 웹사이트를 만들었더니 반응이 엄청나게 좋았던 거지. 커피를 마시고 있던 사람이라는 공통점만 제외하면 모집단도 랜덤, 표본도 랜덤, 묻는 사람도 그냥 막 물어보고. 그런 식이어도 ‘듣는 게 낫다’라는 것을 보여준 거야. 물론 신상품 출시에 엄청난 투자를 하는 대기업에서는 ‘해보고 안 되면 나중에 바꾸면 되지’라는 도박 같은 마인드를 갖기는 어려우니 이런 방법을 마구 쓸 순 없겠지만, 아직 가진 것도 기반도 없는 스타트업에게는 잘 맞는 방식일 수도 있지. 너는 그것과 비슷한 일을 무의식 중에 한 거라고.”

“어… 어? 그럼 내가 블루보틀처럼 한 건가…? 하하하?!”

“네가 블루보틀처럼 성공을 해야 블루보틀처럼 한 거겠지. 아무튼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그런 마인드를 가지고 고객을 중심으로 생각해서 비즈니스를 움직이려 한 것은 아주 칭찬할 만하다는 얘기야. 정말 잘했어. 박수!”

“감사합니다!”


이야기를 들으며 잔을 씻고 있던 바텐더도 장아라의 박수란 말에 놀라 박수를 치기 시작했고, 장아라와 바텐더의 박수를 들은 건너편 테이블과 바탑에서도 무슨 얘기인지도 모르면서 흥겨운 분위기에 박수를 쳐주기 시작했다.




린 스타트업, 스프린트, 그리고 피드백

블루보틀의 성공사례는 스타트업 사회에 상당한 반향을 일으킨 사례로 자주 소개되는 이야기입니다. 일반 소비자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블루보틀이 성공하고 유명세를 얻게 된 이면에는 2012년 구글 벤처가 다른 벤처 캐피털 회사들과 함께 블루보틀의 첫 투자자로 참여하여 온라인 스토어를 ‘스프린트’라는 방식으로 디자인해낸 일화가 있습니다. 유튜브나 구글 등에 ‘Blue Bottle Sprint’로 검색하면 영어 자료는 상당히 쉽게 찾을 수 있는 유명한 케이스입니다.

사실 스프린트는 노나카 이쿠지로 교수의 ‘지식 경영(Knowledge Management)’을 근간으로 하는 장기간의 이론적이고 학문적인 연구의 일부이며, 이후 타케우치 히로타카 교수와 함께 디자인 하기 시작한 SECI모델 및 스크럼이라는 여러 가지 경영 모델의 일부분입니다. 하지만 아마 창업자 여러분들이나 현업 마케터분들이 가장 흥미를 느낄 부분은 바로 스프린트 프로세스에 관련된 이야기일 것입니다. 이 스프린트라는 콘셉트를 간단히 설명하자면, ‘프로젝트에 가장 핵심이 되는 사람들이 모임 -> 이들이 프로젝트의 프로토타입을 몇 종류 제작 -> 소비자에게 선정 및 피드백을 받음 -> 피드백을 반영하여 최종 완성품 출시’라는 스텝을 빠른 속도로 밟아 나간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속도’입니다. 블루보틀 온라인 스토어의 경우 아무런 밑그림도 없는 상태에서 시작해 최종적으로 온라인 스토어를 완성하기까지 단 5일이 걸렸다고 합니다. 속도를 빠르게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에 프로토타입이나 샘플 등의 품질은 전혀 고려대상이 아닙니다. 싸고 변형하기 쉬운, 콘셉트만 이해할 수 있다면 뭐라도 괜찮은 수준의 물건이지요. 블루보틀의 경우에는 손으로 그린 그림 같은 것도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소비자의 피드백 역시 길거리에 나가서 커피를 사 마시는 사람을 무작위로 멈춰 세워, 어떤 것이 가장 좋은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같은 간결한 답변만 받았다고 합니다.

이 방식은 창업을 하는 여러분들도 쉽게 사용할 수 있는 간단한 방식입니다. 아이디어를 내고 간단하게 프로토타입을 그리든가 만들어서 테스트를 하고 결과를 반영하여 바로 수정한다는 별로 어렵지도 복잡하지도, 심지어 노력이나 자금도 그렇게 필요하지 않은 일이지요. 그리고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무작위로 선택된 고객들의 의견에 상당한 일관성이 있다는 것을 체감할 수 있을 겁니다.

그 후 블루보틀 커피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여러분도 잘 아시겠지요. 물론 온라인 세일즈가 엄청나게 상승하기도 했지만, 거기에 ‘구글이 투자한 커피숍’이라는 소문도 더해져 '실리콘밸리의 커피숍'이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습니다. 역시 사업은 70%의 운, 하지만 30%의 준비된 논리라는 말이 정확히 들어맞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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