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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인생 09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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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ankorwriter Aug 05. 2024

유월이 오면

시가 있는 에세이 (9)

When June is come(유월이 오면)


                        Robert Bridge(로버트 브리지즈)


When June is come, then all the day

유월이 오면 온 종일

I'll sit with my love in the scented hay:

내 사랑과 향기로운 마른 풀 위에 앉아 있겠소.

And watch the sunshot palaces high,

그리고 눈부시게 솟은 궁전들을 바라 보겠소

That the white clouds build in the breezy sky.

솔바람 하늘에다 구름이 지은 그 궁전들


She singth, and I do make her a song,

그녀는 노래 부르고, 난 그녀를 위해 노래를 지으며

And read sweet poems the whole day long.

그리고 온 종일 아름다운 시들을 읽으려오 

Unseen as we lie in our haybuilt home,

마른 풀로 지은 우리들의 보금자리에 숨어 누우면  

O life is delight when June is come. 

오 인생은 즐거워라 유월이 오면  


 신록이 깊이를 더하는 유월은 가슴 설렌다. 초여름이 농염한 자태로 청춘을 유혹하는 달이기 때문이다. 학창시절, 기말고사가 끝나는 유월 중순이면 마음은 벌써 산으로 들로 바다로 가 있었다. 요즘은 학생들이 방학을 이용해 해외로 많이 나간다고 하지만 70년대는 서울을 벗어나기만 해도 가슴이 설레었다. 굳이 여행계획이 없더라도 방학은 즐거웠다. 학습과 시험의 중압감에서 벗어나는 긴 여가는 얼마나 달콤한 것 이었던가. 

 

 오월의 화사함이 그대로 남아 있으면서 칠월의 장마와 한증막 더위는 아직 근접하지 않은 유월은 활동하기 좋아서 엉덩이가 방구들에 붙어 있는 사람도 방문을 열게 만든다. 맑은 하늘의 뭉게구름을 보면 함께 떠나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한다.  


 대학에 강의를 다니면서부터 한동안 잊고 지냈던 유월에의 설렘이 되살아났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겸임으로 강의를 시작했는데 캠퍼스를 드나드니 대학시절의 낭만이 중년의 가슴에 다시 피어났었다. 학생들과 함께 호흡하면서 어느새 나도 유월을 기다리고 있었다. 종강파티를 학생들과 함께 하면서 그들의 일부가 되어가고, 함께 할 수 없는 그들만의 스케줄에 괜히 여기는 어떻고 저기는 어떻고 참견도 해 보았다.


 철없는 겸임교수의 들뜸에 아내도 넌지시 동참하였다. 유월 기말고사 때는 한 시간 시험만 보면 끝나니까 아내도 따라 나섰다. 시험 감독을 끝내고 나오면 아내는 캠퍼스 잔디밭에 앉아 피천득 교수의 수필집을 보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마치 캠퍼스 커플 같았다.   

 

 특히 서울에서 버스로 두어 시간 거리의 지방 캠퍼스는 도심의 공해가 범접하지 못하는 곳에 있어 분위기가 한결 좋았다. 신선한 공기와 푸른 하늘, 청정한 산들바람을 실컷 즐길 수 있었다. 치매예방 합시다. 아내에게 한마디 던지면 우리는 서로 좋아하는 시들을 읊기 시작했다. 그러게 애초에 문학 좋아하는 남자에게 시집오는 게 아니었어. 그러면서도 아내는 옛 시조들을 대번에 한 열 수정도 꿰였고 나는 순전히 짧다는 이유만으로 애송시가 된 워즈워드의 ‘무지개’나 브리지즈의 ‘유월이 오면’을 암송했다.

 

 그러다가 1980년대 TBC-FM 일곱 시의 데이트 프로에서 김봉기와 김정림, 두 통기타 듀엣이 브리지즈의 시를 가사로 하여 불렀던 노래를 함께 불렀다.


오 인생은 즐거워, 유월이 오면


  평생을 간직하고 싶은 순간들을 들라고 하면 나는 그때의 유월을 들 것이다.  밴쿠버에 오자마자 이민조건 해지 때문에 비즈니스를 시작해면서 그러한 낭만적 순간을 까맣게 있고 살았는데 금년 유월에는 되살아 날 것 같다. 작년 말에 비즈니스를 그만 둔 후 나나 아내나 모두 학생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우리가 국어시간에 시와 소설을 배웠듯이 여기 영어시간에도 영시와 영문소설을 배운다. 짧은 영시 문장은 외워두는 것이 빠른 영어숙달에 도움이 될 듯하여 열심히 암송한다. 그러면 잔디밭은? 사방 천지에 잔디밭이니 그냥 퍼질러 앉으면 된다. 축복스럽게도 우리는 센트럴 파크가 5분 거리에 있는 동네에 살고 있으니 공원 잔디밭 전체가 우리 것이다. 서머타임 실시로 해도 길어졌고 유월부터는 일조량이 많아지니 마음 내키는 대로 아무 때나 가면 된다. 서울에서는 언감생심이다. 고궁 잔디밭에 잠깐 들어가려고 하면 어디서 나타났는지 경비원이 호루라기를 불면서 나오라고 성화이지 않던가.  


 생각해 보면 사는 것도 마음먹기에 달렸다. 이민 왔다고 생각하지 말고 평생을 밴쿠버에 해외여행 중이라고 생각하면 하루하루가 즐겁고 설레고 기대된다. 밤낮없이 돈 벌 생각에 골몰하면서 주변을 돌아보지 못하면 무엇 때문에 여기 살러 왔다는 말인가. 순간을 즐겁게 보내지 못하면 평생을 즐겁게 보낼 수 없다.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날들이 다가오는데 이런 좋은 날에 좋은 자연환경 속에서 좋은 사람들과 만나 사는 이야기 나누며 정을 주고받아야 내 삶이 충만해 지고 유월에 덜 미안하지 않겠는가. 


 이번 유월에는 야외모임이 있는 곳은 어디나 빠지지 않을 참이다.  <2006.6.3>


<되돌아보니>


유월 지나 칠월이다. 내 인생의 달수는 아마도 시월? 칠십이 시월이면 팔십은 십일월, 그리고 구십이면 십이월이리라. 요즈음은 백세시대라 하니 그 정도로 따져봄은 무리가 아니겠지. 


시월은 상달이라 하지 않던가. 계절 중 가장 좋은 달. 오곡백과 무르익어 수확한 것을 신께 바치는 달. 내 인생농사가 풍작이었는지 흉작이었는지는 아직 모르지만, 가을 날씨처럼 선선한 바람 부는 밴쿠버에서의 여름은 이만하면 잘 살았다는 자화자찬에 빠지게 한다.  


브리지즈의 시를 읊으며 늙은 아내와 데이트를 한다. 겨울에 서슬 퍼런 잔디는 유월부터 강한 햇살에 맥을 못 춘다. 태평양으로 나가는 ‘폴스크리크’의 그랜빌 아일랜드. 나는 아내와 낮은 언덕 잔디위에 앉아 옛 시절을 회상한다. 살면서 힘들었던 나날은 오늘의 편안함을 위한 훈련기간. ‘오. 인생은 즐거워. 유월이 오면’ 나의 계산방식에 따르는 ‘인생의 유월’은 오, 육십 대. 한국에 있을 때는 ‘다 산 인생’으로 간주했었지만 새로운 나라에 와서는 ‘첫 시작 인생’이었다. 


그래. 사람은 마음먹기 나름이야. 앞으로는 백 이십 세까지도 살 수 있다니, 내 인생의 달수를 7월로 맞추어야겠다. 아직 태양은 뜨겁지 않은가. ‘브런치’에서 나는 신출내기이다. 열심히 글 쓰며 가슴 뜨거운 칠십대를 보내야겠다. (2024년 7월 28일 일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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