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존 버거
이 세상에서 가장 확실한 명제가 뭘까요? 그 누구도 반론을 제기할 수 없는 진실은 단 하나입니다. 바로 우리는 언젠가 죽는다, 입니다. 이 단순명료한 명제를 우리는 잊고 살아갑니다. 그러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영원한 이별을 통해 비로소 체감하게 됩니다. 아, 그렇구나, 결국 우리 모두는 숙명적으로 헤어지고, 사라질 거야. 그 순간 아무리 서로를 보고 싶어도 볼 수 없을 거야.
저에게도 그런 순간들이 있었습니다. 특히나 대학 시절 친구의 갑작스런 죽음이 그랬습니다. 제가 한창 바쁠 때 그 친구에게서 메시지를 받은 적이 있습니다. 저는 다음을 기약했지만, 다음 소식은 다른 친구를 통한 그 친구의 죽음이었습니다. 아직도 대학 신입생 시절 그 친구가 활짝 웃으며 다가왔던 날이 생생한데 이제 그 친구는 그 순간의 기억까지 가지고 영영 떠나버렸습니다. 망자의 애도는 그와 공유한 시간들의 결락에 대한 상실감과 더불어 진행됩니다. 이제 그 친구와 나만의 시간들을 기억하는 이 세상의 유일한 남은 자는 오직 나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 실감은 정말 너무나 슬픈 것입니다. 꿈에서 나타난 친구는 대학 교정에 앉아 있었습니다. 저는 꿈 속에서도 그 친구의 죽음을 기억하고 있어서 그 친구의 나타남에 의구심과 원망을 가졌습니다. 꿈에서라도 재회하고 싶었지만 그 친구는 이미 별이 되었다는 사실을 감각한 상태에서의 만남은 다시 한번 그 친구의 죽음을 절절하게 인식하는 과정이었으니까요.
존 버거라는 작가는 우리가 이 죽음을 일상으로 스며들게 하는데에 일가견이 있는 작가입니다. 특히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이라는 단편집에 실린 '리스본'이라는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어느 날 리스본의 광장에서 작가는 한참 전에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만나게 됩니다. 이 불가능한 일이 전혀 비현실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지점에 작가의 깊은 삶과 죽음에 대한 이해와 아름답고 섬세한 표현들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 모자의 판타지적 재회에 그대로 설득되어버리는 겁니다. 그럴 수 있어, 혹은 나도 그러고 싶어.
어머니와 아들의 대화는 아들의 지난 삶에 대한 다시쓰기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 관계에서 오해했던 것들,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을 알아내며 고쳐쓰기의 과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다시 재구성하게 되는 건, 우리가 아무리 늦어도 불가역적 시간의 틈새에서 끝내 얻어내는 빛나는 것들에 대한 희구이자 발견입니다. 무척이나 눈물겹고 아름답죠. 존 버거는 이를테면 이 모든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도 여전히 유효한 그무엇에 대해 섬세하고 따뜻한 시선으로 저마다 크고 작은 상실을 품고 있는 읽는 이들을 가만히 위로합니다.
우리-우리 말이야-우리는 모두 여기 있는 거야. 너나 살아 있는 다른 사람들이 여기 있는 것처럼, 너희와 우리, 우리는 망가진 것을 조금이라도 고치기 위해 여기 있는 거란다.
-존 버거 <여기, 우리가 만나는 곳>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헤어진 모든 망자들과 산자들이 모두 함께 여기에서 망가진 것들을 고치며 공존했으면... 그럼, 저는 그날로 다시 돌아가 그 친구와 바로 만날 약속을 잡고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손을 잡고 이야기를 나눌 겁니다. 다시 헤어진다 해도 그 시간의 추억을 나눠 가진 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