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서의 필요성을 설득하기 위해서
아주 인상 깊은 제자가 있었다. 한 살 터울의 초등학생 남매. 내가 아이들을 만났을 때 맏이인 남자아이는 5학년, 동생인 여자아이는 4학년이었다. 남자아이는 학습능력의 면에서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 학원의 5학년 커리큘럼에 한국사가 있었다. 한국사를 강의한다기 보다는 <한국사 편지>라는 초등 한국사 바이블을 모두 읽고, (여기서 모두란 5권 전권을 듯한다) 학원에 오면 35분씩 2주간 70분에 걸쳐서 30문제 남짓을 풀어내게 한다.
처음에 워크지를 보고 좀 의아했다. 논술학원인데 역사책 읽고 객관식과 주관식이 섞여 있는 역사 문제를 무작정 풀게 하는 게 맞나 싶기도 했다. 달달 외워서 시험을 치는 것도 아닌데 35분만에 15문제 정도를 풀게 하는 게 가능한가도 싶었다. 별다른 설명없이 풀게 한다 하더라도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시간이 20분 정도? 그래서 답을 맞추며 아이들이 모르는 부분을 짚어는 주어야 하니까 최소 15분은 필요했다. 더욱이나 책을 보고 풀어야 하기 때문에 그냥 푸는 것보다 시간이 더 오래 걸려 시간 안에 해낸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실상 대부분의 아이들은 10문제 풀기도 힘들어했다. 그래서 10문제는 첫 주차에 교실에서 풀게 하고, 중간에 10문제 이내로 과제를 내주었는데 이건 자율과제였다. 해오면 칭찬 도장 한 개, 다 맞추면 칭찬 도장 한 개를 더해서 두 개, 이런 식으로 동기를 부여했다. (칭찬 도장을 일정 이상 모으면 간식 꾸러미를 주는 곳이었는데, 아이들이 은근 도장 받기에 열을 올렸다) 그리고 마지막 시간에 남은 10문제를 풀게 했다. 그렇게 해야 겨우 끝나는 과정이었다.
30문제를 수업 시간 내에 다 푼 학생이 딱 한 명있었다. 그가 바로 그 남매 중 맏이였다. 정독 습관이 원래 잘 되어 있는 듯했다. 꼼꼼하게 읽었기 떄문에 필요한 답을 책에서 금새 찾아냈고, 기억하는 것들을 쉽게 써냈다.
그 집안이 남다르다는 것은 남매 중 둘째를 통해서 알게 되었다. 얼마 전 어머니의 생신이었는데 자신은 '독서대'를 선물했다는 것이다. 평소 습득력과 문제 해결 능력이 뛰어나고, 자신이 읽어야 할 책뿐 아니라 맏이가 읽어야 할 책까지 모두 읽고 와서 감상을 이야기하던 아이였다. 그 아이의 그런 성향이 독서대를 생일 선물로 주는 집안 분위기에서 비롯되었음을 깨달았다.
둘째 아이가 나를 놀라게 한 날도 있었다. <멋져 부러 세발자전거>(김남중, 낮은산)를 읽고 활동하는 날이었다. 교재의 질문이 "동화 속의 자전거 대회처럼 순위가 의미가 없는 분야가 어떤 것이 있을까"였다. 다른 4학년 아이들은 감도 잡지 못할 질문이었으나, 동화의 주제와 관련이 싶어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그 둘째 아이는 "연기 분야요!" 라고 대답했다. 연기는 각자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열을 가릴 수 없다는 것이다. "좋은 생각이다. 그렇다면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분야가 연기뿐일까?" 자연히 나는 이런 식의 질문을 던졌고 수업의 방향에 물꼬가 트였다. 그 아이의 이런 총명함이 독서에서 비롯되었음을 나는 확신했다.
두 아이가 초등학생 4, 5학년이던 시절 1년 간 내가 맡았다. 그리고 이후 맡지 않고 있다가 중학교에 진학하면서 내 수업에 들어오게 되었다. 다시 만난 아이들은 책에 완전히 흥미를 잃은 상태였다. 이유를 묻지 않았지만 알 것 같았다. 아이들에게 책보다 더 재미있는 매체가 많았을 테니까.
그러고 보면 중, 고등학생 때 아버지로부터 여러 번들은 말이 있다.
"어릴 땐 책 읽는 거 참 좋아하더니."
초등학생 때까지 여러 책들을 읽다가 사춘기에 접어 들면서 나는 만화책에 제대로 맛이 들렸다. (아버지께서 이 글을 보실 것 같지 않아서 하는 말이지만) 사실 만화책의 세계를 열어준 분이 아버지셨다. 친척의 집에 굴러다니는 과월호 만화 월간지 '나나'를 가져다 준 분이 아버지셨고, 해적판 만화책을 파는 좌판이나 트럭이 오면 거기서 만화책 몇 권을 골라 건내신 것도 아버지였다. 내가 중, 고등학생 때 심지어 수능 성적 나오는 날도 성적표를 가방에 찔러 놓고 만화방에 있었던 이유는 그러니까 다 아버지 덕분이다.
나에겐 만화책이 제자들에겐 유튜브나 게임이 아닐까 생각한다. 말하자면 자기 손으로 손쉽게 선택할 수 있는 자기 취향의 취미를 선택하는 것이다. 또래 문화의 여파도 무시할 수 없지 않을까 싶다. 나만해도 당시 동네에 만화책 대여점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났고, 친구들 모두 여러 만화 대여점에 계정을 만들어 만화책을 빌렸다. 여기에 연체되면 저기에 빌리고, 저기에 연체되면 또다른 곳에서 빌리는 식이었다. 대화에 끼기 위해서는 만화책을 보아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뭐 그렇다고 억지로 봤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렇다면 내가 스스로 책을 읽기 시작한 것은 언제일까? 가만히 생각해보면 고등학생 때였다. 당시 하고 싶은 일이 있었는데, 그와 관련된 책을 우연히 발견하고 사서 읽었던 것이 시작이다. 이후로 알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책을 찾아 읽었던 것 같다. 그러다 어쩌다가 보니 문예창작과 편입생이 되었다. 책과 멀어서는 해낼 수 없는 공부였다. 필요에 의해서 나는 책을 다시 들었고, 그것이 내가 책 읽는 성인으로 거듭난 계기라고 할 수 있다.
올초에 나는 국립 국어원에서 하는 '국어 교육 심화 과정'이라는 연수를 들었다. 사실 학교의 교사들을 위한 연수였는데, 나도 국어 교육의 언저리에 있는 입장에서 수강신청을 해보았던 것이다. 학교에서 일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수강을 거부당하지는 않아서 일주일 정도 열심히 들었다. 여러 분야의 강의가 있었다. 그중 독서 교육에 관한 연수도 있었다. 어떤 형식으로 수업을 해야 아이들이 즐겁게 독서 수업을 할 수가 있는지에 관한 수업이었다.
그때 연사가 이런 말을 했다.
"아이들에게 독서의 필요성에 대해 설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책을 왜 읽어야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선생님들은 어떻게 대답하실 건가요?"
나 또한 필요를 느껴서 다시 독서를 시작한 케이스이지만, 교실에서 만나는 사춘기아이들을 보면 더욱 명확해진다. 스스로 이유를 찾았을 때 갑자기 적극적으로 수업에 참여하는 아이들을 종종 볼 수 있다. 서울의 한 예술 학교에 다니는 아이가 그랬는데, 어느날 내가 물어 본 적이 있다. 왜 갑자기 이렇게 열심히 책을 읽냐고. 아이는 이렇게 말했다.
"그냥 열심히 읽는 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그렇다면 결국은 설득의 문제다.
중학생 아이들과 독서 수업을 할 때 나름 애서가, 다독가라고 하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모아서 이런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다들 책에서 지혜를 얻고, 그것이 중요한 선택에 도움이 되었다고 말했다. 그것들에 대한 각자의 의견을 나누며 책 읽기의 필요성에 대해서 이야기해보자 했지만, 정작 솔직한 내 책 읽기에 대해서는 이야기한 적이 없다.
내 인생에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나또한 책을 통해서 했다. 문예창작과 4학년 때이다. 졸업 후 어떤 길을 가야할까 고민이 한창이었다. 당시 나가던 독서회에서 박경리 작가의 <문학을 사랑하는 젊은이들에게>라는 책을 읽었다. 사실 문예창작과에 편입한 후 2년 간 문학에 대해서 많이 배웠다고 생각했지만, 진정한 의미에서의 문학이 무엇인지는 이 책을 통해서 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러 인상적인 문장이 있었겠지만, 이 책의 한 문장이 나를 글쓰는 길로 인도했다.
작가로 나가겠다는 사람은 도저히 알 수 없는 삶의 모순을 이야기해야 하며 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모른다고 이야기해야 합니다.
도저히 알 수 없는 삶의 모순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그 범위를 명확히 가늠하진 못한 상태였지만, 문학을 공부하면서 그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것에 대해 답을 갖고 있는 것이 작가라고 했다면 나는 졸업 후에도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모른다고 해야 한다니, 그것만큼은 내가 아주 잘할 것 같았다.
이 선택이 내게 어떻게 남게될지는 아직도 미지수다. 어쨌거나 인생의 길을 고민하던 순간에 책 멘토가 되어 주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러나 내가 글을 쓰는 사람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는 아이들에게 불쑥 이런 이야기를 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언제나 속으로만 이 이야기를 되뇔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