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황의 가치 _ 20220929
가로수 은행나무에서 열매가 떨어져 바닥을 뒹군다. 고릿한 냄새가 나는 그것을 밟지 않으려 애쓰다가도 으레 저도 모르게 한두 개 밟게 된다. 으악! 똥이라도 밟은 듯 인상을 쓴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이들은 어쩔 수 없이 그것들을 짓이기며 지나간다. 그렇게 여름의 끝에 은행나무 가로수길은 꼬릿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생각해 보면 참 허무한 일이다. 겨울을 건너 봄, 여름을 지나 마침내 맺은 은행 나무의 열매가 모두에게 환영받지 못한다는 것이. 껍질 안의 것은 아주 별미다. 프라이팬에 구어 먹으면 특히나. 그러나 껍질을 까보지 않고서는 안에 든 맛있는 것을 알 수 없다. 그래서 대부분의 은행나무 열매의 운명은 참 처량하다.
2022년에 기대하는 변화가 없으면 글을 쓰는 일을 중심에 둔 이 끝을 끝내겠다 정해놓고 보니 일년 내내 마음속이 참 지옥 같다. 9월 29일 오늘 기준으로 올해가 93일 남았다. 93일 후에는 다른 삶을 시작해야 할지도 모른다. 이미 거의 확정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올해를 생각해보면 작년 말부터 3월 중순까지 썼던 여성의 삶과 결혼에 관한 이야기가 너무 풀리지 않는다. 일단 중단하고 오래전에 썼던 민담을 리메이크한 작품의 다른 버전을 쓰고 있다. 그마저도 모 제작사 대표님께 보내 피드백을 받아보니, 설정과 세계관이 너무 과한듯 하여 대부분을 뺀 간소한 설정의 버전으로 쓴지 한 달 반. 그 사이 기회가 있어서 또다른 제작사 대표님께 기획안 초안을 보내 피드백을 받았다. 그 대표님은 내가 쓴 기획안을 보고 어떤 장르인지 모르겠다, 즉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라고 말했다. 20여분과의 통화를 종합하면 그것이다. 다양한 장르가 들어있는 작품이지만, 그 중 어떤 것이 메인으로 올라와 있는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통화를 마친 후 나는 그 말의 뜻을 이해하지 못해 다른 작가에게 전화를 걸어서 물어봤다. 그제야 무슨 의미인지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후 며칠을 더 생각해 보니 아직 여러 요소들이 쫀쫀하게 이어져 있지 않아 발생하는 문제라는 결론이다. 비로소 마음이 편해진다. 어쩌면 한달만에 이 긴 이야기가 쫀쫀이 이어 붙길 기대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므로. 그러나 한편으론 전면 수정을 해야 하는 상황에 올해 남은 시간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든다.
사실 이것만 쓸려고 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2고에서 멈춰버린 영화 시나리오를 마지막으로 제대로 수정해보고 싶었다. 그래야 비로소 끝을 낸 듯 마음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그러나 올해 안에 그것을 손 댈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결국 끝을 맞이할 시간을 미루어야 하는 것일까? 고민이 되기 시작했다.
피드백 한번에 모든 것이 허물어져 하루 동안 거의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로 지냈다. 예정해 두었던 DMZ국제다큐영화제 관람도 모두 취소해버리고, 낮엔 칩거하며 생각하다가 어스름해 지면 술을 마시고 취기에 잠들었다. 이틀을 그렇게 보낸 후 왜 그런 피드백을 받았는지 이해할 수 있게 되었고, 끝을 미루는 문제도 결론 내릴 수 있었다.
두 번이나 엎어버린 선택도 내가, 장르를 알 수 없는 기획안도 내가 쓴 것이다. 그 모든 선택에 대한 책임을 지
기 위해서 나는 내년 늦어도 3월까지 아무런 변화가 없다면... 지금과 같은 생활을 정리한다.
얼마 전 선선해진 날씨 고릿한 냄새가 나는 거리를 걷는데, 이 환영받지 못하는 은행의 열매가 지난 십수년을 투자해 만들어낸 나의 글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비관의 극단을 달리고 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