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오랜 Jan 20. 2024

논술 프로그램의 트렌드

교육의 트렌드와 강사로서의 정체성 사이에서

요즘 초등 국어 계열 학원 중 가장 핫한 프랜차이즈 직영점에 면접을 보았다. (편의상 K학원이라고 하겠다) 경기도 모 도시에 생긴 지점에 몇백여 명의 수강생 대기자가 있다는 소문이 돌았던 곳이다. 초등학교 6학년 학생을 수능 국어 3등급으로 만들어 준다는 캐치프레이즈의 반응이 그 정도라고 한다. 작년까지 다녔던 학원이 그 지역에 있어서 원장으로부터 들은 말이다.


정작 내가 면접 보았던 직영점 원장은 '초등학교 6학년', '수능 3등급' 같은 캐치프레이즈 같은 것은 모르고 있었다. 6학년 학생들 중에 그 정도에 도달하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못한 경우도 있다고 솔직하게 말했다. 아마도 자신들 프로그램의 어떤 점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다면서 교재를 보여주었다. 모의고사 비문학 지문을 잘라놓은 짧은 지문으로 하는 독해 연습. 사실 질문지 자체는 엣지 있지 않았지만 지문 내용을 파악해야만 풀 수 있는 것임에는 분명했다. 어떤 점이 학부모를 설득시키는지 단번에 이해가 되었다. 그러나 그 원장의 어떤 말에서 그 모든 것이 허상임을 알아챌 수 있었다.


"아이들은 배경지식 없이 모의고사 비문학 지문을 읽습니다. 우리 학원에서 교재 연구란 그 지문을 어떻게 이해시킬 것인가입니다."


강사가 지문의 내용을 설명해 아이들을 이해시킨다. 아이들은 숙지한 내용으로 간단한 문제를 푼다. 혹은 순서가 반대일 수 있다. 일단 스스로 문제를 풀고, 강사가 설명할 수 있겠지. 그거나 저거나다. 아이가 스스로 읽어낼 수 없는 수준의 지문이라면 먼저 문제 푸는 것은 요식 행위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곳의 수업이 교과 국어 수업과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국어 수업이 문해력에 도움이 된다면 문해력 부족이 우리 사회의 문제일 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국어 수업은 모두가 들으니까. 심지어 학교에서 십수 년 듣지 않는가!


 이 프랜차이즈도 조만간 바닥을 드러내겠구나, 생각했다. 아무리 사교육계의 상품이라도 번지르르한 포장지만으론 오래갈 수 없다.




"2월까지 하고 접자."


총괄 원장께서 본사와의 우여곡절을 주욱 이야기하시더니 이렇게 말했다. 면접을 보았던 K학원 직영점이 있는 학원가에서 나는 못 나가는 독서 논술 프로그램을 수업하는 강사다. 나 이외에도 (적어도 내가 아는 한에서는) 두 명의 강사가 더 이 프로그램을 수업했다. 한 명은 자진해서, 한 명은 학원의 권고로 사직했다. 나 또한 가을쯤 사직하려 했으나 학원에 붙잡혔다. 그런데 본사가 문해력이라는 새로운 컨셉의 초등 국어계열의 프로그램을 개발하기 시작했고, 프로그램에 사형 선고를 내리면서 나도 잘리게 된 것이다.


가을에 말한 내가 사직의 이유는 '나아지는 것이 없어서'이다. 프로그램은 점점 정체성을 잃어갔고, 아이들의 늘지 않았다. 심지어 연령에 맞는 책이 여전히 커리큘럼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는 상황에 대해서 '빼달라' 말하는 내게 총괄 원장은 날을 세웠다. 장황한 설명을 하는 와중에 내 인내심은 바닥났고, 더 이상 이렇게는 일하지 못하겠다는 것이 내 결론이었다.


나아지지 않는 것에 나라는 강사 또한 포함이었다. 자진 사직한 강사의 수업을 이어받으면서 나는 늘 급하게 수업을 준비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3학년부터 6학년까지의 수업을 모조리 내가 준비하는 상황이 되었다. 애들 수는 적으나 그런 상황이 됐다. 그러니 수업 퀄리티가 성에 차지 못하게 될 때가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남기로 하면서 내가 내건 조건은 프로그램을 리뉴얼하는 것이었다. 깔끔하게, 컨셉 살려서, 학부모의 니즈를 충족하고 효용 가치도 있는 프로그램으로 거듭나는 리뉴얼이었다. 그 과정에 나 또한 이 프로그램을 어떻게 제대로 살릴지 고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본사가 반대했다. 팔리지도 않는 프로그램을 리뉴얼해서 뭐 하냐, 그냥 있는 교재로 하고 있으면 우리가 언젠가는 문해력 교재 만들어서 줄게, 그때 갈아타라. 기약 없이 의미 없는 수업을 하라는 본사의 말을 총괄 원장은 거절했다. 거절에 동의한다. 나 또한 의미 없는 기다림을 하고 싶지 않다.


이후 나의 거취 문제에 또 다른 변수가 생겨서, 강사라는 직업을 지속하게 될지에 대한 변수도 생겼다.  

또다시 과도기다.  




K학원 면접 후 내게는 다른 고민이 생겼다. 만약 강사를 계속하게 된다면 나는 어떤 강사가 되어야 할까. 내가 만난 그 직영점 원장은 내게 자신들의 교재에 맞는 비문학 텍스트 수업의 시강을 준비해서 다시 방문해 줄 것을 요청했다. 내가 준비한 시강은 자신들의 수업과 조금 동떨어진 것이기 때문에 판단을 위해서 한 번만 더 보고 싶다는 요청이다. 얼결에 약속을 잡고 돌아서 나오는 길.


정말로 다시 가서 시강을 해야 할까?

내가 저런 수업을 잘할 수 있나?

내가 정말로 하고 싶은 수업은 무엇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질문들이 떠올랐다. 이는 결국 강사로서의 내 정체성의 문제를 고민하게 했다. 애초에 강사라는 직업을 내 것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기 때문에 10년 차가 되어서야 시작된 때 늦은 고민이다.


지금 내가 있는 학원의 본사는 문해력 교재 쪽으로 방향을 틀겠다고 했다. 아마도 트렌드를 따라가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코로나 키즈들의 학력 저하 문제로 독서 논술 학원들의 고민이 깊어진 것도 사실이다. 책 한 권을 주어진 시간 내에 읽어내지 못할 정도로 아이들의 집중력이나 문해력, 학습 능력이 낮아진 탓이다. 결국 책이 없이 비문학 텍스트를 활용한 논술 수업을 하는 학원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이 그런 이유인지도 모른다.  나도 시류를 따라가야 할까? 하지만 K학원과 같은 방식이라면 금방 꺼져버릴 거품 같은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지금 내가 접하고 있는 학원의 완전한 대척점에 있는 학원도 있다. 얼마 전 내가 보조작가를 했던 드라마 작가께서 논술 학원을 차리셨다. 뜬금없이 논술학원을 차려야겠다며 나를 찾아오신 게 불과 몇 달 전이다. 내게 논술 수업이나 학원 운영에 대해서 물으시더니 대뜸 정말로 학원을 여셨다.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도 오픈이 미루어지는 때에 학원으로 작가님을 찾아뵌 적이 있다. 그때 커리큘럼에 대해서 대략 정리가 끝나셨는지 이런 말씀을 하셨다.


"문학을 읽어야지. 재미있는 책을 읽게 하는 게 가장 날 느는 방법이라고 생각해."


H프랜차이즈나 C프랜차이즈 커리큘럼을 볼 수 있는 홈페이지나 유튜브 채널 등을 알려드렸고, 모두 보신 것 같았다. 그분이 보기에 거기 커리큘럼에 있는 책들은 모두 재미가 없어 보였다고 한다. 반박거리가 아주 없진 않았지만 재미있게 읽는 게 느는 방법이라는 면에서 동의하기 때문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그분이 차리신 학원 홈페이지를 보면 처음엔 1:1로 학원 내에서 수업하지만 나중엔 함께 도서관 나들이를 간다고 쓰여있다. 직접 책을 고르고 함께 읽는 수업을 하겠다는 것이다. 참으로 이상적인 수업이다. 물론 찌들도 찌든 사교육계 10년 차 독서 논술 강사의 눈에는 직접 할 수도 있는 도서관 나들이를 십수만 원씩 주고 시킬 부모가 몇이나 될까 싶긴 했다. 어쨌거나 그 학원만의 정체성을 찾은 것은 틀림없었다. 대박이 나든 쪽박을 차든 말이다.  (물론 대박이 나시길 나는 진심으로 응원하고 있다)



나는 어떤 길을 가야 할까?

어떤 길이 옳은?

작가의 이전글 글쓰기를 멀리 밀어 놓아보았건만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