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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창수 Aug 12. 2024

10화. 진주 반지

이별 이야기 / 콩트

  내가 그녀를 처음 만난 것은 대학의 도서관에서였다. 여름 방학에 졸업 논문 준비를 위해서 후배들이 매일 아침 일찍 잡아놓은 고정석으로 향했다. 그날은 항상 옆에서 같이 공부하는 후배 자리에 여자 학생이 앉아서 뭔가를 하고 있었다. 이미 와 있던 후배에게 곁눈으로 힐끔 쳐다보면서 잠깐 밖으로 나오라는 손짓을 했다.

  “누구야?”

  후배에게 커피를 자판기에서 꺼내주면서, 턱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물어봤다. 그녀는 대학연합서클에 같이 활동하는 친구인데. 집이 도서관에 가까워서 여름 방학 동안 후배 자리에서 공부할 거라고 했다.  


  나는 그녀와 학교 식당에서 처음으로 점심을 같이했다. 그녀의 이름이 H라는 것을 알았다. H를 처음 보았을 때, 얼굴에 차가움을 느꼈다. 남자들이 접근할 수 없을 정도로 웃음기 없는, 조금은 냉정해 보이는 분위기였다. 목소리가 차분해서, 무게를 느낄 수 있었다. H와 몇 번 이야기를 나누면서 목소리는 명랑해졌고, 얼굴에 간혹 웃음도 보였다. 나는 그런 H에게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내가 그녀에 관심을 가진 이유는 마음을 열지 않는 그녀의 내면을 알고 싶었기 때문이다. 하루는 H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졸업 후 진로는 결정되었어요?”

  H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외국계 은행에 들어가고 싶다고 했다 이미 목표가 뚜렷한 그녀에게 덧붙일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내가 H와 가까워진 것은 그녀가 외국계 은행에 취업하면서였다. 그녀의 직장이 내가 대학원에서 조교를 하는 학교와 가까이에 있었다. 한동안 서로 바쁜 일로 자주 만나지 못했다. 어느 날, 내가 H에게 회사 퇴근 후 저녁을 같이하자고 연락을 했다. 우리는 서로의 일에 대해서 관심이 많았고, 마음을 여는 계기가 되었다.

  ”일은 재미있어요? “

  H는 아직 정신이 없어 보였지만, 조금씩 적응해 가는 것 같았다. H가 과거보다 매우 부드러워졌고, 표정도 상당히 밝아졌다. 그녀의 우수에 찬 눈빛도 많이 달라졌고, 의젓한 여성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나는 박사 논문을 제출하고, 머리도 식힐 겸, H에게 가을 여행을 제안했다. 그녀는 흔쾌히 좋다고 했다. 그녀도 틀에 박힌 직장생활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이다. H에 대해서는 가족이 다 알고 있었지만, 그녀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몰라서 아직 소개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이번 여행은 그런 가족의 기대를 만족시킬 기회가 되었으면 했다. 월정사로 가는 주변의 산들이 단풍이 들면서 빨갛게 타고 있었다.

  ”괜찮다면, 집으로 부모님께 인사드리러 갔으면 합니다. “

  H는 빨리 좋은 남자 만나서,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혼자 계신 아버지의 부담을 덜어드리고 싶다고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는 H의 손을 살며시 잡고, 월정사 대웅전을 바라보았다.


  아내인 H와 걱정 없는 부부로 살았다. 아내는 10여 년 다녔던 직장도 아이들의 교육을 위해서 그만뒀다. 그런 시간은 더 오래가지 않았다. 내가 강의 중에 조교가 쪽지를 건네주며, 아내가 응급실에 있다는 메시지였다. 건강했던 그녀가 심각한 상황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내는 다행히 안정을 찾아서 집에서 잠이 들어있었다.

  나는 계속 복통에 시달리는 아내에게 종합검사를 해보자고 했다. 나는 같은 대학의 후배 의대 교수에게 아내의 증상을 이야기해 주고, 담당 의사를 소개받았다. 검진 전에 의대 교수에게 들은 말이 계속 머리를 맴돌고 있었다. 나는 아내가 오랫동안 아이들과 힘들었을 일상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신경을 썼다.


  가을이 몇 해 지나갔다. 하늘에는 하얀 눈이 내리고, 아내는 병실 밖에 쌓여가는 눈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어제 담당 의사가 한 말이 떠오르는 듯했다.

  ”몸속에 암이 이미 다른 곳으로 많이 전이된 상태입니다. “

  아내의 머리에는 ‘죽음’이라는 단어와 아이들의 얼굴이 교차했을 것이다.

  평생 아파보지 않았던 아내가 병실에서 하얀 눈을 보며, 온 세상이 하얗게 보이겠지. 나는 이런 상황을 이미 알고 있었다. 몇 년 전 담당 의사가 5년 생존 확률이 10% 정도 된다고, 마음의 준비하라는 말을 기억했다. 아내를 위해서 해줄 수 있는 일이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아내 모르게 흘린 눈물도 이제 마르기 시작했다.


  나는 학교에 휴직계를 내고, 아내 병간호에 전념하기로 했다. 아내의 우울증세를 완화해 주면서 편안한 마음을 갖게 해주고 싶었다. 가끔 잠을 자다가 통증으로 인한 고통을 호소하면, 처방해 온 진통제를 주면서 진정시켰다.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해 체중이 점점 줄어 갔다.

  ”큰애 결혼식을 보고 싶은데·····“

  큰애가 걱정되는지, 아내의 목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심한 고통이 몰려오면, 아내는 자다가 죽었으면 좋겠다는 말을 수없이 했다. 나는 수면제를 처방받아서 조금씩 모아놓았다. 그녀를 끝까지 지키고 싶었지만, 힘든 모습을 보면서 차라리 편하게 해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유혹을 받았다. 나도 점점 지쳐가기 시작할 때쯤이었다.


  ”여보! 당신이 내게 보내준 사랑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어요. 난, 정말 행복했던 여자라고 생각해요. “

   아내의 눈에는 이슬이 맺히기 시작했다.

  “당신이 있어서 너무 행복했고, 다음 생애에도 당신과 함께 할 거요,”

 나는 아내와 마지막 눈인사를 했다. 따뜻했던 그녀의 손길이 온몸을 감싸고 있었고, 생생한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나는 아내를 위해서 마지막 결정을 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그녀의 옆에 약을 놓았다. 그녀의 손가락에는 내가 끼워줬던 하얀 진주 반지가 빛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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