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은 참 단순하다.
합리적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듯해도, 잠깐 방심(?)하는 순간 비이성적 행동을 한다. 현재 본인이 가진 주식계좌를 보면 이런 말이 더욱 뼈저리게 느껴진다. 이런 일은 거창한 곳이 아니라도 일상에서 비일비재하게 목격할 수 있다. 누군가의 철저한 계획에 의해 내 행동이 유도되는 여러 현상은 디자인에서도 'Affordance Design'이란 이름으로 널리 활용된다. 물론, 목적이 어떤 것이냐에 따라 좋고 나쁨이 결정되겠지만.
건전지만 필요했다.
그런데 정작 다이소 문을 벗어날 때에는 손에 일회용 면도기, 마우스 패드, 충전기 C타입 젠더까지 들고 있었다. 이건 내가 단순해서 그런 걸까, 아니면 누군가의 철저한 계획일까. 모두 아니다. 평소 필요했던 게 적절한 시점에 생각났을 뿐. 나는 두 번, 세 번 매장을 가는 수고를 줄인 합리적인 인간일 뿐이다. 정말?
다이소 매장을 방문해 보면 느껴지는 것이 있다.
참 좁은 공간에 그다지 큰 고민 없이 물건을 밀어 넣어놨구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진짜 그럴까? 조금 전 말한 이런 경험은 다이소 한 두 번 가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것이다. 나만 이런 게 아니다. 이건 내가 필요했던 물건을 그때마다 기억했을 수도 있지만 그 기억이 나게 한 것은 누군가의 계획일 수도 있다. 다이소는 매장의 구성이 모두 지갑을 열게 설계되었다. 자주 쓰는 제품이나 생활 속 소모성 제품은 매장 안쪽에 배치한다. 보통 이런 가벼운 아이템을 목적으로 매장에 방문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동선은 꼬불꼬불한 미로형이다. 매대의 위치를 유심히 살펴보면, 정방형이 아니라 미로처럼 만들어 놓았다.
이케아를 방문하면 유사한 경험을 한다.
차이가 있다면 이케아는 거대한 미로, 다이소는 작은 미로다. 이케아 매장에서는 어느 시점이 지나면 고객은 뒤로 돌아나갈 수 없다. 오로지 전진만 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현재 나의 위치를 알 수 없다는 것이다. 매장에서 설계한 길을 따라서 앞으로만 나갈 수 있다. 반강제적으로 모든 매장을 지나쳐야 밖으로 나갈 수 있다. 자칫 지치거나 따분할 정도의 구간에는 여지없이 현재 나의 위치를 알려주는 게시대나 간식코너가 있다. 내가 처음 방문한 이케아는 홍콩이었다. 밀려드는 사람들의 물결에 떠밀려 앞으로 앞으로만 갔다. 나의 선택권 없이 동선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아주 불편하고 기분이 나빴다. 치수를 재는 몽당연필을 한 움큼 가져 나오는 것으로 소소한 복수는 했지만 어쩐지 손해 본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다이소가 이케아와 다른 점은 내 동선을 내가 결정할 수 있다는 점이다.
또한, 다이소 매장은 크지 않기에(가끔 큰 다이소 매장을 가게 되면 이런 각오도 무뎌진다) 필요한 물건코너에 바로 직진할 수 있다. 남자의 목표 지향적 본능 덕분에 필요한 물건을 향해 직진할 수 있지만, 일단 목적을 달성하고 나면 전리품 살피듯 느긋한 마음이 들어 돌아오는 보행 속도가 늦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여자들의 본능은 입구부터 안쪽까지 하나씩 모든 영역을 살피는 게 자연스럽다. 이거 남자나 여자 모두에게 맞춤형 같은 느낌이다. 이케아보다 작은 규모의 매장이 갖는 장점이다.
요즘 대형마트를 가면 자율계산대를 이용한다.
이마트 자율계산대를 구분 짓는 진열벽에는 온갖 제품들이 나의 본능을 자극하는 아우성을 지르는 기분이다.
"이거 안 샀지?"
"이런 거 하나 있으면 좋잖아? 가격도 얼마 안 해, 빨리 집어 들어. 줄 밀리잖아"
껌과 초콜릿과 참치캔과 온갖 주전부리들이 내 귓가에 대고 유혹의 말을 속삭인다. 차례가 빨리 와서 줄이 줄어들면 좋은데, 자칫 밀리기라도 하는 날이라면 시선을 애써 앞으로 둬야 한다. 걔들 말이 다 맞기 때문이다.
마트 진열대의 전략처럼 다이소도 그럴 것이다.
왜 아니겠는가. 다이소의 진열방식 역시 철저한 계산에 의한 결과물이다. 만약 매장의 진열이 아무런 계획 없이 구성됐다면 그게 더 나쁜 결과를 초래할 것이다. 결국 진열은 말 없는 안내자다. 우리는 무언가에 끌려 사는 줄 알면서도 스스로 선택했다는 믿음을 가진다. 특정한 목적이 있는 결과물 역시 디자인이다. 디자이너의 시선에서 보면 매장 전체가 하나의 계획 같다. 그리고, 그 시험적인 계획은 늘 새로운 변화를 한다.
미학은 아름다움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현실에서는 모든 아름다움이 어찌 보면 절묘하게 계산된 무질서처럼 보일 수 있다. 아무렇게나 놓은 듯 보이지만 철저하게 계산된 배치는 다이소 진열의 미학이라 해도 되지 않을까?
그 진열 앞에 선 우리는 늘 똑같은 행위를 반복하면서 물건을 집어든다. 그리고 말한다.
"이건 진짜 필요했어, 이번엔 정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