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쌓여야 비로소 보인다
신뢰는 그냥 생기지 않는다. 시간이 축적되는 과정과 그 과정의 결과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나이가 들면서 더욱 절감하고 있다. 특히 인간관계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그 사람은 믿을 수 있다거나, 참 사람 좋다는 소리를 듣는 분들의 공통점은 곁에서 오래 지켜 본 사람들이 그의 행실을 보고 내린 판단이라는 점이다. 한두 번 보고 만들어진 어설픈 평판은 누구도 믿지 않는다. 하지만 일이 년, 여러 해 동안 관계를 이어 온 사람들이 말하는 목소리에는 힘이 있다.
어디 관계뿐이랴. 실력과 성과에도 시간의 축적은 필요하다. 어떠한 시험을 앞둔 수험생과 학생 또한 마찬가지다. 지금 드러난 소속과 결과만 보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지만, 그 이면에는 치열한 노력과 땀이 있었다.
정확한 프로그램명이 기억나진 않지만, 건축가인 유현준 교수가 출연한 어떤 영상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사람들은 이력서 상의 한 줄을 보지만, 사실 그 한 줄이 생기기까지 그 사람의 시간과 노력이 들어간 것"이라는 말이었다. 나는 대단한 통찰이라고 생각했다. 우리가 흔히 보는 사람들의 경력, 이력, 필모그래피는 단순한 단어들과 문장들이지만 당사자에게는 시간과 자신의 모든 에너지가 응축된 결과이기 때문이다. 마치 장석주 시인의 '대추 한 알'과 비슷한 맥락아닐까. 저절로 붉어질 리 없는 대추 한 알은 저 안에 무서리 내린 몇 밤과 땡볕 두어 달, 초승달 몇 달이 들어서서 둥글게 만들어졌다는 시인의 혜안 말이다.
어떤 사람에게 시간을 낸다는 것은 생명을 내어준 것이나 다름없다는 말이 생각난다. 사람에게 시간은 생명이다. 생명이 없으면 시간도 없다. 존재의 의미가 없다. 그러한 인간에게 시간을 내어서 누군가를 만나거나, 공부를 하거나, 어떠한 목표를 향해 몸짓을 한다는 행위는 생명을 기꺼이 내놓는 고귀한 일임을 기억해야 한다.
시간이 쌓여야 보이는 법이다. 그렇기에 지나간 과거는 그래서 자신에게 어떠한 의미와 이유가 있었으며, 지난한 세월을 지나야 진가가 발휘된다. 흙을 채취하고 불순물을 제거해서 토련하기 좋은 상태로 만들어내며, 이를 물레질로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서 말리고 초벌해서 유약을 발라 다시 구워서 식혀야 도자기가 만들어지듯이 말이다.
생전에는 타당한 혹은 좋은 평가를 얻지 못했지만 사후에 높이 평가되는 예술가들이 얼마나 많은가.
19세기 최고의 철학자 가운데 한 명으로 평가받는 프리드리히 니체는 생전에 새로운(급진적이기까지 한) 철학적 시각을 제시하고, 난해하고 독특한 텍스트로 인해 저서가 많이 팔리지도 않은 인기 없는 철학자였다. 반면 20세기 들어 두 번의 세계대전과 큰 사회 변화를 맞이하면서 니체의 사상과 통찰들이 철학은 물론이고 문학과 예술, 건축, 회화에 이르기까지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신은 죽었다"고 선언하며 실존주의 철학의 토대를 마련한 그는 마르틴 하이데거, 장폴 사르트르 등 후대의 철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바로크 시대의 거장으로 서양음악의 가장 위대한 작곡가로 평가받는 요한 세바스티안 바흐도 생전에는 인기 많은 작곡가는 아니었다고 한다. 천여 곡이 넘는 작품을 남긴 그는 펠릭스 멘델스존이 바흐의 작품들을 발굴하고 세상에 소개함으로써 사후에 재평가를 받는다. 오죽하면 이런 평가까지 나올까. 음악의 구약성서로 비유되는 '평균율 클라이버 곡집'은 세상이 멸망해서 모든 음악이 사라져도 바흐의 이 곡집만 있으면 사라진 모든 음악을 재생할 수 있다고 한다.
생전에는 한 점의 그림만 팔지 못했던 빈센트 반 고흐는 자신의 왼쪽 귀를 자르고 정신병원에 간 일화가 워낙 유명하다. ‘별이 빛나는 밤’은 병원에서 그린 그림이라고 한다. 그는 가난했고 질병 속에서 고통 받았지만 화가로 활동하는 동안 이천 여점의 작품을 남겼고,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로 평가받는다.
물론 살아서 활동하고 있을 때 마음에 드는 평가를 받으면 좋겠지만, 어디 인생사가 내 마음대로 되는 경우가 얼마나 있던가. 단지 우리는 그저 묵묵히 지금 여기의 일상을 살아내면 그만이다. 그렇게 시간이 축적되면 언젠가 빛을 볼 수도 있고, 그렇지 않더라도 열과 성을 다한 삶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고 찬란하다.
시간은 흐르고 그 흐름 안에 우리의 삶도 관계도 쌓인다. 축적된 시간 속에서 우리는 특별함을 발견한다. 그리고 그 축적의 힘을 믿고 묵묵히 사는 모두를 응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