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벅뚜벅 일상에서 살아남기
세 잎 클로버의 꽃말은 행복이다. 네 잎 클로버에 가려져 있지만 행복 또한 어떻게 보면 흔하지 않을 수 있다. 왜냐면 행복 또한 어디에나 있어도 그것을 인지하지 못한다면 그건 행복이 아닐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어린아이일수록 자신의 행복에 솔직한 면이 존재한다. 그건 다른 사람을 좋아하고 그 사람이 있어서 행복하고 그런 감정들 말이다. 우린 그것, 즉 행복에 익숙할수록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을 생략하는 일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너를 좋아해.'라는 말도 어느 순간이 지나면 그 말을 하는 것에 무척이나 어색해진다. 익숙하기 때문에 당연히 알 것이라 생각하는 건 잘못된 생각인 것 같다. 만약 나조차 확신이 없는 사랑이 존재한다면 우린 그것을 사랑한다 표현할 수 있을까? 당연 없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건 사랑이 아닌 미련이고, 미련은 사랑이라 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미련의 사전적 의미는 깨끗이 잊지 못하고 끌리는 데가 남아 있는 마음이라고 서술이 되어 있다.
그 의미처럼 미련은 잊지 못하는 마음에 곁에 맴도는 느낌이다. 미련이 있다 하여 행복과 거리가 멀다고 할 수는 없지만, 미련이 남았다고 했을 때 행복하다고 느끼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미련이라는 건 일단 상대방이 자신에게 감정이 없을 때 드는 기분이니 말이다. 화자도 미련이란 감정이 있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는 행복이라는 감정이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미련을 끊어내는 것에 힘들었지.
그러니 행복과 미련은 거리감이 있는 단어인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세 잎 클로버는 흔하게 피어있는 토끼풀이라고 생각할 때가 많다. 물론 사전적 의미도 이와 비슷하다. 하지만 흔하게 피어있어서 그 덕분에 행복이라는 꽃말이 생기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왜냐하면 행복 또한 주의에 흔하기 때문이다. 우린 가끔 "나는 무엇 때문에 행복해!!"라고 할 때가 있다. 정말 그것 때문에 생각이 났을 수 있고 오히려 프로그램 같은 것에 참여를 했을 수 있다.
그렇다고 그 행복이 일시적이라는 말은 아니다. 물론 그것 때문에 진짜 행복했을 수 있고 아니면 진짜 일시적인 생각 때문에 나온 말일 수가 있다. 그건 본인만 알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화자가 말을 하고 싶은 건 우린 너무 익숙해져 버린 행복 속에서 행운만을 찾는다. 그래서 한때 화자의 외할머니도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그 세 잎 클로버들 사이에서 네 잎 클로버를 찾아다니셨다.
그랬기 때문에 우리들의 행복 속에 행운을 찾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 세 잎 클로버 사이에서 네 잎 클로버의 행운이 우리에게 전해졌으면 하는 마음을 잘 알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네 잎 클로버의 행운을 찾는 사람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다만 주위의 행복에 조금만 눈길을 준다면 그 속에서 또 다른 행운을 찾을 수 있을 거라 말을 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니까 너무 네 잎 클로버 찾기에 얽매이지 말고 주변에 흔하디 흔한 세 잎 클로버에게도 눈길을 주는 것이 어떨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