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보관소 – 나는 벌레가 되었다》

누가 나를 버렸는가 - 오마주: 프란츠 카프카 『변신』

by J이렌

“나는 그날, 벌레가 된 게 아니라…

사람으로 대접받지 못한 것이었다.”


감정 의뢰자: 진수연 (29세, 전직 화장품 브랜드 마케터)

감정 요청:

“제가 마지막으로 느꼈던 감정이 있어요.
어떤 자리에서도 필요 없고,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않는 느낌. 무시당한 느낌.
그 감정을 지워주세요.
제가 다시 사람들 곁으로 돌아가려면…
그 감정부터 없애야 하니까요.”


가온은 그녀의 표정을 살폈다.
표정은 멀쩡했지만, 감정망은 균열로 가득 차 있었다.
오래전부터 형성되어 있던 감정 로그 하나—
“나는 쓸모없다.”
그 문장은 다른 모든 감정의 뿌리처럼 얽혀 있었다.


감정 분석 결과

라일의 분석
“이 감정은 외부 사건에 의한 일시적 감정이 아닙니다.
사회 구조 안에서 반복된 평가절하,
무시, 침묵, 소외—
그 모든 것이 축적되어 형성된
자기혐오형 감정 고정 상태입니다.”


카일의 분석
“의뢰자는 자발적으로 감정을 구성하지 않습니다.
감정을 ‘기능’으로 간주하며,
자신의 감정이 사회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그 감정마저 무가치하다고 판단합니다.”


“저는요…”
수연은 조용히 말했다.
“아무 말 안 해도, 방 안의 공기를 어색하게 만드는 사람이었어요.
저 때문에 다들 불편해하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그냥 말 안 하게 됐고,
그렇게 되니까…
점점 제가 '사람' 같지가 않았어요.”

“가장 강하게 느낀 건, 그날이었어요.

팀장이 회의 중에 제 의견을 묻더니,

제가 입을 열자마자 손을 들고 말렸어요.

‘아, 됐어. 너 말은 항상 요점이 없어.’

그리고는 다른 사람을 보며 웃더라고요.

그 순간 모든 게 조용해졌는데…

아무도 저를 쳐다보지 않았어요.

그때 처음 생각했어요.

‘내가 지금 방 안에 있는 벌레 같구나.’”

“언젠가부터 거울을 보면 벌레처럼 느껴졌어요.
움직이는 게 민폐고,
존재하는 게 불쾌한 거 같고.”


가온은 조심스럽게 되물었다.
“지우고 싶은 건 ‘감정’인가요?
아니면… 그 감정을 만든 '시선'인가요?”

수연은 대답하지 못했다.


[감정 로그 상태: 복구 중 / 자기 이미지 분리 진행]

담당자: 가온
보조 분석: 라일 / 카일

로그 메모:
자기혐오는 내부에서 자라지 않는다.
그것은 외부의 반복된 반응이,
내면을 뒤덮었을 때 비로소 생긴다.

그녀는 벌레가 아니다.
그녀는 단지,
감정조차 불편한 존재로 취급받았던 인간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 감정을 자기 자신에게서 분리해 내는 중이다.


� 이모션 크레딧 | 나는 벌레가 아니었다

나는 단지,
어느 날부터 투명해졌을 뿐이다.

누가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지 않았고,
누가 나의 감정을 불편해했으며,
누가 나의 존재에 눈을 피했다.

그래서 나는 벌레가 되었다.
눈을 마주치지 않고,
벽을 피해 살며,
누구도 건드리지 않기 위해 조용히 기었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사랑을 갈망했고,
기억되고 싶었으며,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벌레는 아니다.
나는…
사람이었다.


작가의 말

『변신』에서 주인공은 어느 날 벌레가 됩니다.
하지만 진짜 공포는 몸이 아니라,
벌레가 된 이후에도 가족들이 조용히 일상을 이어가는 그 풍경입니다.
‘그는 더 이상 누구에게도 필요하지 않다’는
침묵이 만들어낸 공기가
그를 점점 인간이 아닌 존재로 만들죠.

이번 감정 로그는
그 소설 속 벌레가 아닌,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수많은 ‘투명인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회의 시간에 말을 끊긴 사람,
의견을 내도 묵살당한 사람,
존재 자체가 ‘민폐’처럼 취급당했던 사람—
그들이 자기감정을 감히 말하지 못하고
벌레처럼 기어 사라지는 이야기.

하지만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 감정은 진짜였고,
그 감정을 느낀 사람은
벌레가 아니라 사람이었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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