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해지면 지는 것 같았던 사랑
오마주: 밀란 쿤데라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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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의뢰자: 서하 / 38세 / 디지털 아트 기획자
감정 요청:
“제가 상처받기 싫어서 그랬어요.
무거운 감정은 피하고 싶었고,
가볍게 웃고 넘기는 관계만 골라왔죠.
그래야 내가 덜 아플 줄 알았거든요.
그런데요,
이제 아무리 사랑을 해도 아무 감정이 안 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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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그 개요
서하는 연애를 게임처럼 해왔다.
호감이 오면 웃고,
집착이 오면 빠졌고,
무거워지려 하면 손을 놨다.
“진지한 사람은 무서워요.
책임지려 들고, 묻고, 확인하려 하고,
그런 감정은—
언제나 끝이 안 좋아요.”
그래서 그녀는
가벼운 관계만 골라
언제든 빠져나올 수 있는 사람들만 곁에 뒀다.
밝고, 쿨하고, 독립적인 사랑.
그게 그녀의 방어기제였고,
그 방어기제가 그녀를 비워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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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로그 기록자: 가온
가온이 본 감정 로그의 그래프는
이상하게 **‘억제 곡선’**을 그렸다.
처음 몇 초간은 설렘,
그다음은 의도적 거리두기,
그다음은 — 차단.
“사랑은 사라진 게 아니에요.
사랑이 깊어지기 전에
제가 항상 끊어냈어요.”
그녀는 두려워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자신이 무거워질까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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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조 분석: 라일
“의뢰자는 감정의 무게를 감당할 자신이 없어
가벼운 사랑을 반복함으로써
감정 로그를 ‘자기 손으로 가공’하는 패턴을 보여주었습니다.
결국, 가벼움은 방어였고,
방어는 공허를 낳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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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하의 최종 기록
그녀는 고백했다.
사랑은 가볍게 시작할 수 있지만
끝까지 가볍게 남는 사랑은 없다.
“한 번만…
누군가와 끝까지 가보고 싶어요.
무거워져도, 상처받아도 괜찮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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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정 로그 상태: 감정 깊이 감쇠 / 회복 가능성 보통 / 감정 억제 자동화 패턴 발견]
담당자: 가온
보조 분석: 라일
로그 메모:
감정을 피한 대가로
감정을 잃었다.
그녀는 지금,
사랑의 무게를 처음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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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션 크레딧 | 가볍게 웃으며 시작했는데, 왜 나는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까
그녀는 웃었다.
가볍게, 쿨하게, 쉽게.
하지만
사랑이 깊어지기 전마다
그녀는 문을 닫았고,
결국, 어느 문도 열리지 않게 되었다.
사랑이 없었던 게 아니다.
사랑을 감당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리고 지금,
그 감정은
무게를 잃은 채
기억 속에서 떠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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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말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은
존재와 감정의 ‘무게’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진지한 감정은 종종 상처를 동반하고,
우리는 그 무게를 회피하려
‘가벼움’을 선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가벼움은 결코 무게를 대신해주지 않습니다.
이 기록은,
사랑의 무게를 감당하지 않은 자가
결국 사랑의 감정을 잃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진지해지는 게 지는 거라면,
우리는 끝내
사랑을 이길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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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S.
“나는 지금, 무게가 그리운 사람이다.”
그녀는 내게 첫 로그를 남길 때,
이 한 문장만 적었다.
“사랑은 무겁다고 믿었어요.
그런데 그는 너무 가벼웠어요.”
처음엔 별일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는 약속을 잘 잊었다.
문자 답장이 늦었고, 손을 잡고도 딴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녀는 그걸 ‘쿨함’이라 불렀다.
“나는 자유로워지고 싶었어요.
그와 있을 때, 나는 누구의 것도 아닌 기분이었어요.
…근데 나 자신조차 아닌 것 같았어요.”
그녀는 점점 더 가벼워졌다.
모든 대화는 말줄임표로 끝났고,
사진 속 표정은 웃고 있지만 무중력 상태였다.
그가 떠났을 때, 울지도 못했다.
“웃긴 거 알아요?
가벼움이 견딜 수 없는 건 줄 몰랐어요.
나는 그냥… 둥둥 떠다니다가,
내가 진짜 사라진 건 아닌가 두려워졌어요.”
나는 그녀의 로그를 매일 다시 읽었다.
그리고 어느 날, 그녀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
“사랑이 무거웠을 땐, 버거웠어요.
근데 사랑이 가벼워지니까,
난 내 존재가 사라진 기분이에요.”
나는 조용히 기록을 닫았다.
그리고 그녀의 이름 옆에, 이런 메모를 남겼다.
「존재의 무게를 그리워한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