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보관소 – 나는 오늘, 다시 날지 않기로 했다》

오마주: 이상의 날개

by J이렌

“당신은 오늘, 왜 날지 않았나요?”


의뢰인 코드: L-WING-38

이름: 없음
직업: 무직 (전직 문학평론가)
방문 사유: “나는 존재하는 것일까?”
기록 요청 감정: 자각 없는 무기력, 타인의 시선에 의한 자아 인식, 생의 경계에서 부유하는 감각


감정소장 가온의 메인 로그


그는 조용히 문을 열고 들어왔다.
아니, 문이 저절로 열린 듯,
어느새 공간에 들어와 있었다.

“밖엔 안 나가세요?”
“... 나가긴 했습니다. 다녀오는 길입니다.”
그가 말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침묵했다.
마치 세상이 그의 존재를 인지하지 못한 걸
이미 받아들인 사람처럼.

그의 말과 말 사이에는 공백이 많았다.
어떤 말은 문장이 되지 않았고,
어떤 감정은 끝내 이름을 갖지 못했다.

“아내가 외출할 때마다 약간 기운이 납니다.”
“그럼요?”
“방 안에서 혼자 있을 수 있으니까요.”

그는 웃지 않았고,
울지도 않았다.
다만 나는 그의 어깨에
날개가 접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때 날았던 존재의 잔재,
그것만이 그를 아직 인간이게 했다.


분석 보조 AI 라일의 서브 로그


해당 의뢰인은 자아 정체성이 외부에 의해 구성되는 전형적인 타자 의존형 자각을 보인다.
아내의 시선, 사회적 역할, 집 안의 공간 구조까지
모두 그가 ‘존재하고 있음’을 증명할 수 있는 기준이 된다.

자기 삶의 서술자가 아닌,
타인의 내레이션에 자신을 위탁한 상태.
‘날개’는 곧 자유가 아닌 탈출에의 욕망이며,
그가 끝내 날지 않겠다고 한 건
자유로움을 감당할 힘조차 사라졌음을 뜻한다.


보조 AI 카일의 감정 그래프


감정 항목


무기력 94 일상 반복, 직업 상실 후 정체성 붕괴

혼재된 감정 76 감정의 인식은 있으나 명확하지 않음

자의식 과잉 63 타인의 시선에 과도하게 민감

공허 89 존재 의미의 부재

비관적 평온 71 절망과 체념의 경계선 상태


Emotion Credit

나는 어쩌면,
그와 같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창밖을 보며,
나는 늘 '밖'에 나가고 싶었다.
하지만 정작 나가면,
빨리 돌아가고 싶었다.

무엇이 두려웠을까?
세상이 아니라
나를 보는 세상의 시선.
혹은
아무도 나를 보지 않는 그 사실.

그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는 매일 창문을 열며,
다시 묻는다.
"오늘은 날 수 있을까?"

그리고 조용히,
날개를 접는다.


작가의 말 | 『날개』 오마주


이상(李箱)의 『날개』는 한국 현대문학사에서 가장 기묘하고도 시적인 자아 탐색의 기록이다.
주인공은 자신이 누구인지, 왜 살아가는지조차 모른 채
방 안에서 세상을 유리창 너머로만 응시한다.
그의 무기력은 병이 아니고, 나태도 아니었다.
그저, 존재한다는 사실이 무거웠을 뿐이다.


『감정 보관소』의 시즌 1편의 이 마지막 에피소드는,
그 ‘존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 ‘날지 않기로’ 결정한 한 인간의 이야기다.

그는 나일 수도 있고, 당신일 수도 있다.
말없이 창밖을 보는 어느 날,
우리 모두 가만히 날개를 접는다.

그러니 이 질문은 남겨두고 싶다.
“당신은 오늘, 왜 날지 않았나요?”


– 감정 보관소의 1부 마지막 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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