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 보관소 – 베르테르의 감정》

그 사람은 날 몰랐고, 나는 그 사람을 너무 알아버렸다

by J이렌

오마주: 요한 볼프강 폰 괴테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


감정 의뢰자: R / 36세 / 전직 시인 / 현 감정노동자


감정 요청:


“나는 그 사람과 아무 일도 없었어요.

손도 잡지 않았고,

심지어 고백조차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왜 아직도 이 감정이 나를 살게 하고,

또 죽이고 있는 걸까요?”


로그 개요


슬픔은 말로 써지지 않았다

내가 그를 처음 만났을 때,

그는 감정을 남기러 온 게 아니었다.

그저, 감정의 잔해를 정리하러 왔을 뿐.


R은 예전엔 시인이었다.

시로 밥을 먹을 수 없게 된 후,

고객 응대를 하는 콜센터에 취직했다.


감정이 메말라가던 어느 날,

이상한 습관을 가진 고객 A가 나타났다.

항상 수화기 너머로 미소를 짓는 듯한 말투,

사소한 실수에도

“그럴 수도 있죠. 오늘도 수고 많으셨어요.”

라고 말하던 그 사람.


R은 처음으로,

누군가 자신을 감정 있는 존재로 대해주는 걸 느꼈다.


하지만 그건 착각이었다.

그 사람은 그저 친절한 고객일 뿐,

자신에게 감정을 주려 한 적도,

받을 준비도 하지 않았다.


며칠 후,

A는 이사를 가며

계약을 해지했고,

그 이후 R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사랑의 감정에

끝없이 눌려 살게 되었다.


“그 사람은 내게 아무 감정도 없었는데,

나는 내 감정 하나로 전 생을 살아버렸다.”



감정 분석 결과


카일의 분석

“이 감정은 고립된 사랑 감정군입니다.

발화되지 않은 감정은 응고되며,

그 응고는 자가중독의 형태로 남아

자기 정체성을 흔듭니다.”


라일의 보조 기록

“의뢰자는 타인의 감정이 아닌

자신의 감정에 스스로 취해

상처받은 케이스.

베르테르형 감정 증후군으로 분류됨.”



가온의 로그 기록


가온은 이 로그를 복원하며

의뢰자의 시 초고를 함께 열람했다.

시에는 한 줄, 반복되는 문장이 있었다.


“나는 당신을 사랑한 적이 없어요.

단지, 당신을 사랑하는 나를 사랑했을 뿐이에요.”


가온은 조용히 로그에 메모를 남겼다.


“감정은 가끔,

상대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건넨 러브레터다.”



[감정 로그 상태: 폐쇄성 감정군 / 고립 사랑 증후군 / 기록 완료]


담당자: 가온

보조 분석: 라일 / 카일



⭐ 이모션 크레딧 |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이 가장 슬프다


의뢰자는 아무 일도 없었다고 말한다.

사랑하지 않았고,

고백도 하지 않았고,

연락처조차 모른다고.


하지만 이 감정은 있었다.

존재했고,

살아 있었고,

그를 울게 했고,

때로는 그를 살게도 했다.


가장 슬픈 사랑은,

끝난 사랑이 아니라

시작되지도 못한 감정이었는지도 모른다.


《슬픔에 대하여》 by J이렌


그 하루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조용히 지나갔다.

탁자 위엔 다 식은 커피잔들이 남아 있고,

나른한 봄 기운에

고양이는 졸고 있었다.


빗물이 두드리던 창가엔

뿌옇게 김이 서리고,

거실에 걸린 벽시계 초침 소리와

공기에 흐르는 첼로 선율마저

변함없던 어느 오후.


푹 꺼진 카우치의 한 쿠션과

연기만이 남은 재떨이의 담배 꽁초만이,

그의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아무것도 남지 않은 줄 알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줄 알았다.


그 공간에 남은 흔적만이

우리의 이별을 상기시켰다.

내 뺨에 흐르는 눈물만이

이별을 확인시켰다.



작가의 말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은

단지 이뤄지지 않은 사랑의 기록이 아니다.

발화되지 못한 감정이

어떻게 한 사람의 생을 잠식하는가에 대한 기록이다.


이 감정 로그는

현대의 ‘베르테르들’에게 바칩니다.

타인을 사랑해서가 아니라,

타인을 사랑하는 자신이

존재의 마지막 증거였던 사람들에게.


당신은 혼자가 아니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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