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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정현진 Jul 13. 2022

나는 현진이에게 배우는 중이다

나의 일곱 살엔 미처 알지 못했던 것들

현진이의 일기




엄마의 일기


기억을 더듬어보자면, 나의 첫 미술관 관람은 스물셋 여행 중에 갔던 유럽 어느 나라에서였. 사실 유명한 미술관이라고 하니 무작정 들어가서 관람했던 것뿐이었다. 나에게 미술은 너무 멀고 어려운 존재였고, 도대체 그림을 보며 무얼 느껴야 하는 것인지 몰라 어색하기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스무 살 전까지 제대로 미술관을 가본 적이 없었다. 엄마 손을 잡고 유명 박물관이나 체험관은 가보았지만, 미술관은 가 본 적이 없었다. 먹고사는 게 바빴던 엄마는 명화를 접할 기회가 전혀 없었고 그래서 몰랐다. 몰랐으니 데려갈 수가 없었다. 러니 나도 알리가 없었다.


그러다 스물셋에 처음으로 미술관을 갔을 때 느껴지는 거리감이 싫었다. 어른 몫의 제값을 내고 입장한 미술관에서 몸에 맞지 않는 값비싼 어른 옷을 입은 아이마냥 위축되는 내 모습을 인정하기 싫었다. 그래서 한국에 돌아온 뒤부터 명화나 화가에 대한 책을 읽으며 나름의 공부를 시작했고, 그것이 그림에 대한 내 관심의 시작이었다.




일곱 살 현진이는 그림을 좋아한다. 보통의 아이들처럼 만들고 그리는 것을 좋아할 뿐 아니라, 그림 보는 것을 즐긴다. 일곱 살 초반에 집에 들인 명화 전집을 시작으로 작가와 작품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마침 유치원에서 명화와 관련된 수업을 하면서 그림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되었다.  많이 알게 되니 더 좋아하게 되었고, 좋아해서 자꾸 찾아보다 보니 점점 더 아는 게 많아다.


구스타프 클림트 전시회를 한다는 이야기를 듣자마자, 현진이는 꼭 가야 한다며 매일같이 나를 볶아대기 시작했다. 제 작품이 아닌 미디어 전시라 현진이가 과연 좋아할지 의문이 남긴 했지만, 우리는 아빠와 네 살 동생까지 온 가족이 10시 오픈시간에 맞춰 아침 일찍부터 서울로 출동했다.


전시는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웅장했고 멋있었다. 현진이 역시 예상보다 훨씬 더 전시를 즐겼다. 사방이 그림으로 가득 차고 바뀌는 모습에 신기해 했고, 아는 그림들이 나오자 작품 이름을 이야기하며 흥분했다. 영상 전시는 한 회차에 50분씩인데, 아빠와 유진이가 1회 차 감상을 마치고 카페에서 둘만의 데이트를 즐기는 동안 현진이와 나는 2회 차를 한 번 더 감상했다. 2회 차는 방에 흩뿌리듯 전시되는 그림들을 한 쪽 벽에 차례차례 찬찬히 비춰주는 방에 용히 앉아 그림을 감상하는 일에 집중했고,  번 더 제대로 보고 싶다던 작품 '키스'까지 나오고 나서야 현진이의 관람 끝이 났다. 현진이는 정말 재미있었다는 말을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했다.




나의 일곱 살 시절에 '구스타프 클림트 전시'를 봤다면 나는 어땠을까? 지금 현진이가 경험하는 수많은 것들이 30년 전만 해도 흔한 건 아니었다. 현진이와 나 사이에는 그렇게 30년의 기나긴 세월과 그 세월이 가져온 커다란 변화들이 존재한다. 더구나 일곱 살의 나와 일곱 살의 현진이의 경험치 사이에는 30년의 세월보다 더 깊고 넓은 골짜기가 있다. 래서 나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보면 현진이가 부럽기도 하다. 지금의 내가 좋아하는 미술이나 뮤지컬 같은 것들을 현진이처럼 어릴 때부터 알게 되었더라면, 나의 흥미는 더 깊어지지 않았을까 하는 류의 미련. 어렸을 때부터 더 많은 것을 겪어보았더라면, 그렇다면 더 많은 걸 좋아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약간의 아쉬움.


다른 모든 것들처럼 그림도 아는 만큼 보인다. 나는 다 큰 어른이 되어 보았던 것을, 일곱 살 아이 보고 있다. 내가 약간의 오기와 함께 공부로 그림을 알아가기 시작했다면, 현진이는 재밌게 알아가고 마음으로 느끼고 있다. 피어나는 금빛 나무를 보며 단순히 멋지다는 말을 넘어 '찬란하다'는 단어를 떠올릴 줄 아는 일곱 살 아이의 세상에선, 어쩌면 내가 보이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이 보이고 내가 느끼는 것보다 더 많은 걸 느끼고 있겠지.


그래서 현진이가 보는 것과 느끼는 것을 나누는 일은, 나의 어린 시절에 남겨둔 미련을 조금씩 닦아내는 일이다. 늘 현진이의 '찬란하다'는 말에 내 눈에 담긴 그림이 정말로 더 찬란하게 보였던 것처럼, 현진이가 가끔 내뱉는 놀라운 말들은 나를 일곱 살의 어린 마음으로 데려가곤 한다. 오늘도 그랬다. 오늘 미술관에선 30년 세월을 거슬러온 일곱 살 여자아이가 멋진 남자 친구의 손을 잡고 벅찬 마음으로 눈앞에 펼쳐진 찬란한 세상을 바라봤다. 그리고 전시회를 보고 돌아오는 길, 내 마음속 일곱 살 아이가 말했다. '친구야, 고마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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