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자 도둑 4

by 도라지

성은희가 대훈대학교 교수들과 춤을 추는 동안, 최재원과 김도훈이 미술관에서 함께 나오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그날 밤 사람들은 술독에 빠져있는 페로몬의 밤공기를 마음껏 호흡하며 인생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성은희는 잃어버린 모자 얘기를 그 밤엔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 밤 이후로 성은희도 모자도 다 잊고 있었다. 달 뒤쯤 프리테오스 아트센터 조우진 대표로부터 전화를 받기 전까지, 성은희의 연락처는 내게 따로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이기자님, 안녕하세요~ 오늘 이기자님께 좋은 친구 한 분 소개해 드리려는데, 오후에 아트센터로 오시겠어요?"


조우진은 명석한 두뇌를 가진 젊은 사업가다. 일 년 전 지역 내 몇몇 인사들이 어울려 술자리가 있었을 때, 우연히 처음 만났다.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 다섯 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내게 접근을 했었다. 연봉부터 거론하던 언론사 대표와는 다르게, 조우진은 그날 본인의 머리 위에 두르고 있던 머리띠를 내 머리에 씌워주며 호감을 표시했었다. 이튿날부터 프리테오스로 와서 일해 달라는 이메일을 연거푸 몇 통 보내기도 했었다.


머리띠를 두른 조우진의 첫인상은 잡지에서나 보던 모델 느낌이었다. 잘 빠진 슈트발에 약간 웨이브진 짧은 단발에 머리띠를 하고 다니는 남자는 보기 드물었다. 이십 대도 아니고 삼십 대 중반의 남성의 감각이라고 하기엔, 매우 놀랍고 신선했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조우진은 결혼해서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술자리에서 만났던 다음날, 머리띠는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비록 내가 박봉의 젊지 않은 미혼 여성이라 해도, 기혼자랑 사귀고 싶을 만큼 절박한 어떠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질 않았다.


삼복더위의 한 여름날, 덜덜거리는 차를 몰고 아트센터로 갔다. 프리테오스 아트센터, 신적인 것 이전의 세계에서 조우진은 무엇을 찾고 싶은 걸까? 조우진의 캐릭터는 누구도 금방 알아채기가 힘들다.


젊고 늘씬한 여직원이 육층 대표실로 안내를 한다. 조우진은 본인의 입맛대로 사람들을 배치할 수 있는 능력자임은 분명하다. 내가 그의 요청을 거절했던 것은, 그가 능력자임을 단박에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의 기대치에 부응하려고 애쓸 게 뻔한 나의 모습이 싫었다. 나는 언제나 나의 기대치에만 부응하고 싶을 따름이다.


대표실로 들어서자, 조우진이 칠층 야외 옥상으로 안내를 한다. 와인바와 테이블이 딸린 귀빈실에서 두 번 와인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귀빈실 밖으로 잘 가꾸어진 야외 정원이 내다 보인다. 오후 5시지만, 여전히 대낮같이 뜨거운 여름 오후였다. 귀빈실에서 성은희가 벌써부터 와인을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조우진이 말도 꺼내기 전에, 블랙 페도라를 쓴 성은희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소리쳤다.


"이기자님, 오랜만이에요~ 오늘 오신다는 분이 이진영 기자였어요?"


성은희가 조우진을 향해 앙탈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조우진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지역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 두 분을 서로 소개해드리고 싶었던 건데, 이미 안면이 있으셨군요~ 그럼 따로 소개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조우진이 내 앞으로 와인 잔을 하나 내밀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가 이 번에 저희 아트센터에서 고객님들을 모시고 정기적인 모임을 하나 추진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고객 섭외 및 기획은 이기자님이 맡아주시면 어떨까요? 이건 일부 고객님들과 친목 도모 수준의 프로젝트라서, 엄밀하게 회사 차원의 일이라고 할 수도 없을 거 같아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작년에 프리테오스 스카우트 제의 거절을 그가 의식하며 말하는 것 같았다. 기획일을 좋아하는 내가 흔쾌히 수락했다. 대단한 사회적 성공 욕망이 있지도 않지만, 일단 나는 재밌게 일하는 걸 좋아한다. 아트센터 일은 어찌 됐든 예술과 무관할 수는 없다.


조우진은 다음 주에 프리테오스에서 곧 열리게 될 성은희 전시회 일로 성은희를 부른 거 같았다. 사람이 작품 전시될 공간 배치를 위해 잠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귀빈실에 나지막하게 니나 시몬의 목소리가 깔린다.


내가 제프 버클리의 라일락 와인보다, 니나 시몬의 라일락 와인을 더 좋아한다고 했던 말을 조우진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건지 그건 알 수가 없다. 제프 버클리가 부른 라일락 와인은 애잔하고 아련하지만, 슬프기보다 신비롭게 아름답다. 하지만 니나 시몬의 라일락 와인을 들으면, 내 존재 전부가 무너져 내리곤 한다. 붉은색 와인잔 속에 니나 시몬의 투박한 듯 애절한 음성이 넘실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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