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은희가 대훈대학교 교수들과 춤을 추는 동안, 최재원과 김도훈이 미술관에서 함께 나오는 모습이 멀리 보였다. 그날 밤 사람들은 술독에 빠져있는 페로몬의 밤공기를 마음껏 호흡하며 인생을 즐기는 것처럼 보였다. 더 이상 성은희는 잃어버린 모자 얘기를 그 밤엔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 밤 이후로 성은희도 모자도 다 잊고 있었다. 두 달 뒤쯤 프리테오스 아트센터 조우진 대표로부터 전화를 받기 전까지, 성은희의 연락처는 내게 따로 저장되어 있지 않았다.
"이기자님, 안녕하세요~ 오늘 이기자님께 좋은 친구 한 분 소개해 드리려는데, 오후에 아트센터로 오시겠어요?"
조우진은 명석한 두뇌를 가진 젊은 사업가다. 일 년 전 지역 내 몇몇 인사들이 어울려 술자리가 있었을 때, 우연히 처음 만났다. 그 자리에 있던 남자들 다섯 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내게 접근을 했었다. 연봉부터 거론하던 언론사 대표와는 다르게, 조우진은 그날 본인의 머리 위에 두르고 있던 머리띠를 내 머리에 씌워주며 호감을 표시했었다. 이튿날부터 프리테오스로 와서 일해 달라는 이메일을 연거푸 몇 통 보내기도 했었다.
머리띠를 두른 조우진의 첫인상은 잡지에서나 보던 모델 느낌이었다. 잘 빠진 슈트발에 약간 웨이브진 짧은 단발에 머리띠를 하고 다니는 남자는 보기 드물었다. 이십 대도 아니고 삼십 대 중반의 남성의 감각이라고 하기엔, 매우 놀랍고 신선했었다. 나보다 두 살 아래인 조우진은 결혼해서 딸이 하나 있다고 했다.
우리가 술자리에서 만났던 그 다음날, 머리띠는 휴지통으로 들어갔다. 비록 내가 박봉의 젊지 않은 미혼 여성이라 해도, 기혼자랑 사귀고 싶을 만큼 절박한 어떠한 욕망에 사로잡혀 있질 않았다.
삼복더위의 한 여름날, 덜덜거리는 차를 몰고 아트센터로 갔다. 프리테오스 아트센터, 신적인 것 이전의 세계에서 조우진은 무엇을 찾고 싶은 걸까? 조우진의 캐릭터는 누구도 금방 알아채기가 힘들다.
젊고 늘씬한 여직원이 육층 대표실로 안내를 한다. 조우진은 본인의 입맛대로 사람들을 배치할 수 있는 능력자임은 분명하다. 내가 그의 요청을 거절했던 것은, 그가 능력자임을 단박에 눈치챘기 때문이었다. 그의 기대치에 부응하려고 애쓸 게 뻔한 나의 모습이 싫었다. 나는 언제나 나의 기대치에만 부응하고 싶을 따름이다.
대표실로 들어서자, 조우진이 칠층 야외 옥상으로 안내를 한다. 와인바와 테이블이 딸린 귀빈실에서 두 번 와인 대접을 받은 적이 있었다. 귀빈실 밖으로 잘 가꾸어진 야외 정원이 내다 보인다. 오후 5시지만, 여전히 대낮같이 뜨거운 여름 오후였다. 귀빈실에서 성은희가 벌써부터 와인을 홀짝거리며 마시고 있었다. 조우진이 말도 꺼내기 전에, 블랙 페도라를 쓴 성은희가 나를 알아보고 반갑게 소리쳤다.
"이기자님, 오랜만이에요~ 오늘 오신다는 분이 이진영 기자였어요?"
성은희가 조우진을 향해 앙탈스러운 시선을 보내며 말했다. 조우진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우리 지역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여성 두 분을 서로 소개해드리고 싶었던 건데, 이미 안면이 있으셨군요~ 그럼 따로 소개는 드리지 않겠습니다."
조우진이 내 앞으로 와인 잔을 하나 내밀며 계속 말을 이어갔다.
"제가 이 번에 저희 아트센터에서 고객님들을 모시고 정기적인 모임을 하나 추진하려고 계획 중입니다. 고객 섭외 및 기획은 이기자님이 맡아주시면 어떨까요? 이건 일부 고객님들과 친목 도모 수준의 프로젝트라서, 엄밀하게 회사 차원의 일이라고 할 수도 없을 거 같아서 부탁드리는 겁니다."
작년에 프리테오스 스카우트 제의 거절을 그가 의식하며 말하는 것 같았다. 기획일을 좋아하는 내가 흔쾌히 수락했다. 대단한 사회적 성공 욕망이 있지도 않지만, 일단 나는 재밌게 일하는 걸 좋아한다. 아트센터 일은 어찌 됐든 예술과 무관할 수는 없다.
조우진은 다음 주에 프리테오스에서 곧 열리게 될 성은희 전시회 일로 성은희를 부른 거 같았다. 두 사람이 작품 전시될 공간 배치를 위해 잠시 아래층으로 내려갔다. 귀빈실에 나지막하게 니나 시몬의 목소리가 깔린다.
내가 제프 버클리의 라일락 와인보다, 니나 시몬의 라일락 와인을 더 좋아한다고 했던 말을 조우진이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건지 그건 알 수가 없다. 제프 버클리가 부른 라일락 와인은 애잔하고 아련하지만, 슬프기보다 신비롭게 아름답다. 하지만 니나 시몬의 라일락 와인을 들으면, 내 존재 전부가 무너져 내리곤 한다. 붉은색 와인잔 속에 니나 시몬의 투박한 듯 애절한 음성이 넘실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