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모자 도둑 5

by 도라지

삼복더위가 지나고 처서도 지났다. 한낮의 더위는 아직 남아있지만, 그 속에도 숨을 편히 고를 만큼의 서늘한 바람이 조금씩 지나가고 있었다. 8월 하순이었다. 성은희의 귀국 후 두 번째 전시가 열리는 날이었다.


프리테오스 아트센터 1층 홀에 사람들이 가득했다. 지난번 구스토 미술관 오픈 파티 때 왔던 손님들도 많이 보였다. 김도훈 작가도 와있었다. 낯이 익은 지역 사진작가들의 얼굴도 있었다. 수묵화 작가 권 현과 요즘 들어 아예 전공을 바꾼 것처럼 퍼포먼스를 더 자주 선보이는 화가 전지수의 얼굴도 보인다.


권현의 눈빛이 마치 수도승처럼 맑다면, 전지수는 무당처럼 신기 있어 보이는 눈빛이다. 두 사람은 동갑 여성이며 청신대 출신으로, 이들은 다 구관장의 라인업이다. 그런데 구교수는 보이지 않는다. 전지수의 옷차림과 화장술로 미루어 보아, 오늘도 퍼포먼스가 예정된 것 같았다.


그리고 구스토 오픈파티 때처럼, 대훈대학교 교수 네 명이 똑같은 멤버로 참석을 했다. 조우진 대표와 개인적으로 친분 있는 도의원, 시의원도 왔다. 사람을 가리는 듯 주변을 살피는 도청 정무부지사의 얼굴도 낯이 익었다.


조우진은 재즈 뮤지션 한 명만 섭외했다. 재즈 뮤지션의 공연이 끝나고, 전지수가 하얀 모시적삼을 두르고 홀의 한가운데로 들어섰다. 무당춤과 전통 학춤의 중간 단계 정도에서 휘적거리는 그녀의 춤사위를, 지역 내에선 퍼포먼스로 인정해주고 있었다.


저 몸짓을 독립된 예술로 보기엔 난감한 부분이 없지 않았다. 그저 지극히 평범한 이벤트라고 부르는 것이 적당하긴 하지만, 나는 한번도 그런 비평을 하지 못했다. 그녀의 퍼포먼스는 그녀의 그림보다 못했다. 그럼에도 전지수가 저러고 이곳저곳에 살이 훤히 비치는 흰색 저고리를 입고 나타나는 데는, 사진작가 남편의 공보다는 정무부지사의 노고가 더 크다는 평도 있었다.


전지수는 어디에 이쁜 구석이 있는지 한참을 들여다봐야, 가끔 한 구석에서 이쁨을 발견할지도 모르는 얼굴이다. 다만 그녀는 비교적 훤칠한 키에 군더더기 없는 몸매를 가지고 있다. 그녀는 자신의 몸이 얼굴보다 쓸만하다는 것을 깨달은 듯 보인다.


몇 해전 전지수가 크게 아팠었다. 그 이후로 그녀는 몸을 활용한 예술의 길로 방향을 바꾼 것처럼 행동했다. 화폭에 유화를 그리던 그녀가 자신의 몸으로 작품세계를 바꾸었다. 그녀 나이 이제 마흔 여섯이다. 그럴 수 있는 나이다.


오십이 넘은 여성들을 더 이상 여성으로 취급하지 않는 사회의 시선에 쫓기듯, 그녀의 춤사위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기도 했다. 불안한 건 예술로서의 가치가 없다는 것을 그녀는 아직 모르고 있나 보다. 예술이 예술로서의 가치를 인정받는 것은, 표현하는 작가의 흔들리지 않는 정신 때문이다. 그래도 언젠가 그녀가 몸으로 표현하려는 것이 한낱 여성의 몸동작에 그치지 않고, 인간세상을 담은 한 편의 스토리가 되기를 나는 바라고 있었다.


전지수의 공연이 끝나고 전지수가 조우진과 성은희가 있는 쪽으로 다가왔다. 블랙 페도라를 쓰고 있던 성은희가 먼저 입을 열었다.


"전지수 작가님은 유화 전공했다면서요? 오늘 퍼포먼스 너무 fantastic~해요. 나도 전 작가님처럼 퍼포먼스를 해보고 싶은 욕망이 마구마구 생기네요~그 한복 와우, wonderful~"


성은희의 시선이 전지수의 자태를 위아래로 스캔하듯이 샅샅이 훑었다. 성은희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고, 전지수가 땀에 밴 흰색 저고리의 동정 깃 사이로 손수건을 넣어 가볍게 두드렸다. 한 겹밖에 되지 않는 그녀의 얇은 저고리 속에서 땀에 젖은 그녀의 어깨선이 훤히 드러나 보이고 있었다. 성은희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으며, 양미간의 눈살을 빠르게 찌푸렸다가 재빨리 풀었다.


성은희의 오른손에는 여전히 와인잔이 들려있었다. 김도훈 작가가 저쪽에서 줄곧 성은희를 바라보았다. 성은희가 비틀거리며 이층으로 올라갔다. 화장실이나 휴게실로 가는 듯 보였다. 저쪽에 서서 권현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김도훈도 담배를 꺼내며, 계단을 따라 천천히 위로 올라가고 있을 때였다.


이층 복도 난간에서 아래층을 향해 술주정하듯 크게 외치는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늘 주인공은 나 성은희예요~ 여러분, 파리에서 온 성은희의 전시회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그녀가 러시아 발레리노처럼 양쪽 팔을 서로 엇갈리며 허리를 숙이고 인사하는 제스처를 보여준다.


"Anyway, 내 모자가 또 사라졌네요. 한국에선 여자가 마음에 들면 모자를 가져가나요?"


쳇 베이커의 음악을 좋아하는 조우진이 틀어놓은 클래식한 엠프 소리에도, 그녀의 목소리는 아래층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쳇 베이커의 트럼펫 선율 위에서 그녀의 멜랑꼴리한 억양이 묘하게 어울리는 느낌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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