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ᆢᆢ 남자가 물었다.
"왜 이렇게 내 앞에 늦게 나타난 거야?"
여자가 말했다.
"내 운명을 이기고 오느라 시간이 좀 걸렸어. 하지만 너무 늦은 건 아니야. 우리는 지금 만나야 할 사람들이었어. 내 안에 이런 확신은 처음이거든. 너는 나와 맞춤이야. 너를 만나려고 내게 단련 시간이 필요했던 건가봐. 너는 내가 기다려 온 단 한 사람이야."ᆢᆢ>
민재가 책장을 덮으며 피식 쓴웃음을 지었다. 소설 속 여자는 51세, 남자는 50세로 그려지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남자는 발기가 되었다가 안되었다가 하는 놈으로 묘사되었다. 비뇨기과 의사인 민재의 소견 따위 확인할 것도 없이, 소설 속 주인공 남자의 발기부전은 과도한 스트레스 때문이다. 여자 주인공이 51세에 자기와 꼭 맞는 남자를 만났다고 확신한 것은, 남자의 성기가 아니라 그 남자의 영혼이었다. '과연 그런 게 있을까?'라고 민재는 야유라도 하는 것처럼 책을 식탁의 한 귀퉁이로 던지듯 밀어 놓고, 주방 식탁의 의자를 뒤로 밀며 일어섰다.
쿨럭쿨럭, 저쪽 방에서 아버지가 내뱉는 마른기침 소리가 들렸다. 창밖에서부터 거실 쪽으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왔다. 어제저녁에도 아버진 옛날 첫사랑 여자의 이름을 부르며, 데이트 약속이 있다고 한사코 밖을 나가겠다고 하셨다. 어머니 살아생전에 아버지가 치매 증상을 보이지 않으신 게 천만다행이었다. 기어이 문밖을 나서시려는 아버지는 웃저고리는 입었지만, 아래는 집에서 입고 있던 헐렁한 실내복 바지 차림이셨다. 잠시 동네 한 바퀴 산책이나 다녀올 요량으로, 민재가 아버지를 부축하여 집 밖을 나섰었다. 달빛이 좋은 저녁 밤이었다. 아버지는 아파트 공원을 몇 걸음 걸으시다가, 불쑥 말씀하셨다.
"민재야, 미안하다. 그래도 내가 얼른 죽겠다는 말은 하지 않으련다. 약 잘 먹고 운동하면서 더 노력해보마~"
십분 전까지만 해도 첫사랑을 만나러 나가야 한다고 떼를 쓰던 열일곱 살의 아버지는 사라지고, 어느새 팔순 아버지가 민재 옆에서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이고 계셨다. 대학교수로 정년퇴직한 아버지가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한 건, 이년 전 어머니가 암으로 돌아가시고 나서 바로 몇 달 뒤였다. 보름달의 둥근 몸통 아래로 구름이 낮게 지나가고 있었다.
아버지와 천천히 공원을 두 바퀴 돌고 아파트 공동 현관문을 들어서려고 할 때, 하은이 헐레벌떡 뛰어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숨을 헉헉거리며 뛰어오던 하은이 민재와 아버지를 발견하고 천진하게 웃으며 다가왔다.
"아버님, 괜찮으세요?"
하은의 얼굴엔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있었다. 민재와 모텔방에서 섹스를 나눌 때도 가끔 그녀의 이마에 맺힌 저 땀방울을 본 적이 있다. 낯익은 땀방울에 민재의 남성이 단단해지는 느낌이었다. 민재가 짐짓 무심한 어투로 응답했다.
"응, 이제 괜찮아. 뛰어올 것까진 없었는데, 아무튼 너무 늦게 불러서... 같이 올라갔다가 내려오자."
민재는 아버지를 침실에 모셔다 드리고 잠드는 모습을 확인했다. 아직 한 번도 집에선 하은과 섹스를 나눈 적이 없었다. 구태여 모텔까지 가야 하나? 민재가 잠시 생각을 해본다. 이 집엔 더 이상 전 와이프의 흔적 따위 없는지 오래되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기 전에도 와이프는 부모님이 살고 계시던 이 집에, 일 년에 두 번 올 뿐이었다. 어머니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치매 증상을 보이기 시작하면서 와이프는 아예 여기를 오지 않았다. 그리고 민재는 이혼을 했다.
하은은 민재의 의원에서 일하는 간호조무사다. 민재는 종합병원에서 근무하다가 개원을 해서 독립했다. 사년 전에 개원할 때만 해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서울에서 진성 여대 교수로 재직 중인 와이프와 영재 수준의 뛰어난 아들도 있고, 그때만 해도 어머니도 살아계셨다. 민재는 훤칠한 외모 덕에 종합병원에서도 인기 원탑의 자리를 한결같이 유지할 수 있었다. 개원할 때 간호사와 조무사를 뽑는 자리에도, 어떻게 소문을 들었는지 수십 명이 지원할 정도였다.
민재는 종합병원에서 겪어본 간호사들을 지침 삼아, 그의 직원 선발에 있어 '무던한 심성과 인내심'있어 보이는 여자들을 우선 선별했다. 하은이는 그런 점에서 매우 높은 점수를 받았다. 몸매마저 무던해서, 다른 여직원들과 민재를 두고 경쟁하며 다투기에도 일단 그 방면에선 자격 미달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