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색 낮달이 창백하게 푸른 겨울 하늘의 동쪽에 걸려있었다. 아직 하늘에 남아있는 태양이 조금씩 서쪽 방향으로 기울어져 가면서, 이파리 하나 없이 매끈한 몸으로 길게 뻗은 겨울나무의 꼭대기에서 바로 아래 언저리까지만 붉은 갈색으로 물을 들였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는 만큼 나무 꼭대기 부분의 붉은빛들이 점점 더 짧아져갔다.
배가 하얗고 날개 끝이 하얀 검은 까치들이 붉은 갈색빛으로 반짝이는 나뭇가지 위로 날아와서 앉았다. 까치가 기다랗게 마른나무의 빈 가지에 착륙할 때마다 순간적으로 앙상한 가지가 흔들리는 모습이 마치 까치가 제 몸을 흔들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다른 까치가 앉아있지 않은 나무를 골라서, 혼자서만 나무 하나를 독차지하고 있는 까치는 보이지 않았다. 어쩌다 그 나무가 까치들을 사로잡았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유독 한 그루 나무의 빈 가지들에만 까치들이 서로 예의라도 차리듯이 띄엄띄엄 앉아 있었다.
차가운 겨울바람이 나무들을 흔들고 지나가는데, 발가벗은 나무에선 소리가 나지 않았다. 마른 잎들이 제 몸을 비틀어가며 둥그렇게 말린 채로 여전히 나뭇가지에 붙어 있는 것들은 바람에 요란스럽게 소리를 질러댔다. 저 멀리 있는 겨울 바다에서 나는 소리와 비슷한 것도 같았다.
파란색 몸통 옆으로 양쪽 팔에 빨간색 두 줄이 둥글게 그려진 점퍼를 입은 육십 대 남자만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공원을 몇 바퀴째 뛰어다니고, 까치들은 오직 한 나무에만 집중하여 자꾸만 왕복 비행을 한다.
오후 네시 반, 동네에 있는 도서관 옆으로 꾸며져 있는 작은 공원에는 산책하는 사람들보다 까치들의 숫자가 더 많았다. 온몸에 한 점의 빈틈도 없이 새까만 길고양이가 재빠르게 나무들 사이를 옮겨 다니고 있었다. 배가 홀쭉한 검은 고양이보다 한껏 여유로워 보이는 까치 한 마리가 상수리 나뭇잎으로 뒤덮여있는 공원 수풀 속에 내려앉았다. 검은색 고양이가 슬금슬금 제 앞으로 지나가도 까치는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검은색 까치와 검은색 고양이가 나무 아래 쌓여있는 낙엽 위에 서서 서로를 염탐하듯이 바라보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냉동실 얼음처럼 창백해 보이는 낮달이 떠있는 겨울 하늘의 맞은편에서 붉은 해는 석양을 준비하느라 분주히 걸음을 옮겨가고, 태양이 서쪽으로 완전히 넘어간 뒤에 겨울나무의 꼭대기에는 더 이상 붉은 갈색이 남아있지 않았다. 붉은빛이 나무의 꼭대기에 걸려있던 그 마지막 순간은 오후 다섯 시가 채 못된 시간이었다.
벌거벗고 있어도 관능적이지 않은 겨울나무가 태양이 사라진 시간 속에서 더없이 초라하고 앙상해 보였다. 그래도 마지막 태양빛이 겨울나무의 꼭대기를 비추고 있던 오후 네시 반이라는 시간이, 한낮의 태양빛 못지않게 세상을 위로해 주었음을 해가 완전히 지고 나서야 깨닫게 되었다.
해와 달이 있는 겨울날 오후 네시 반은 어쩌면 지금 내 인생의 시간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한낮에 눈부시게 이글거리는 태양을 연모하거나 서쪽으로 사라져 완전히 모습을 감춘 태양에 대한 회상을 할 것이 아니라, 지금 해와 달을 동시에 품은 내 인생의 오후 네시 반을 감사하고 사랑해야겠다는 열망이 보름달처럼 부풀어 올랐다. 온전히 벌거벗고도 관능적이지 않은 겨울나무를 바라보며 여성들의 오십 대를 더불어 생각해본 한파 속 겨울 공원 오후의 풍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