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시

by 도라지

둘째 애를 임신했을 때였다. 첫째 때도 그렇고 둘째 때도 그렇고 입덧이란 걸 아예 모르고 지났는데, 임신 초기에도 하지 않았던 음식 투정을 둘째 만삭 즈음에 하게 될 줄은 나도 몰랐다.


다음 달이면 애가 나오는데, 아홉 달째 들어서 유독 먹고 싶은 게 딱 하나 생겼던 것이다. 인내심으로 한다면 국가대표급인 나도 참을 수 없을 만큼 간절히 먹고 싶었던 것은, 붉게 익은 홍시였다.


시기적으로 보니 아마도 이때쯤이 아니었을까 싶다. 엄동설한의 저녁 시간은, 없는 사람들에겐 명치끝이 아리도록 추웠던 것 같다. 그날따라 낮부터 생각났던 홍시가 저녁을 먹고 난 뒤에도 머릿속에서 영 떠나질 않았다.


그 해는 IMF가 시작된 해였다. 대리점 사업을 막 시작했던 남편이 때마침 터진 IMF로 본사가 부도나면서, 덩달아 우리까지 부도를 맞게 되었을 때였다. 그 당시 통장에 찍힌 잔고는 28만원 정도였다.


사업에 실패하고 두문불출하고 있던 남편의 등을 떠밀어 늦은 저녁 동네 슈퍼로 내보냈던 기억이 생생하다. 28만원 잔고를 기억 못 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날 밤 안으로 홍시 한 개를 꼭 먹어야 잠이 올 것만 같았다.

겨울날 늦은 저녁, 빙판길을 잠바 주머니에 만원 한 장 찔러 넣고 나간 남편이 한참 후에 돌아왔을 때, 그의 손에 들려있던 것은 홍시가 아니라 딱딱한 단감이었다. 동네 슈퍼를 두세 군데 돌아보았어도 홍시는 없고 단감만 있었다고 했다. 그날은 화를 내지도 못하고, 그냥 단감을 깎아서 남편을 먹였다.


첫째 낳고 둘째 애 출산일이 가까워 오도록, 뭐 하나 사달라고 한 적 없던 마누라가 처음으로 먹고 싶다고 한 게 홍시였는데, 하필이면 내가 때를 잘못 맞췄나 보다. 요즘 마트에 가봐도 12월까지만 해도 진열돼 있던 홍시가 보이지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 단감이 늘어서 있다. 그랬구나, 내가 홍시가 먹고 싶다고 추운 겨울 저녁 남편을 거리로 내보냈던 시기는, 오늘처럼 분명 1월이었던 게 틀림없다.

이제 우리 집은 어려웠던 그 시절에 비한다면 분명히 부자다. 대봉시 홍시도 마음껏 사 먹을 수 있고, 온갖 수입 과일도 다 사 먹을 수 있을 만큼 부자다. 여전히 미용실은 일 년에 한 번을 갈지라도, 마트엔 일주일에 두 번 이상 간다.


그러면 부자 아닌가? 대출은 있지만 버젓이 부부 공동명의로 아파트도 있다. 이 정도면 나는 부자라고 생각해야 한다. 더 큰 욕심부리지 않고, 몸 건강하게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있으면 족한 것이다. 난방비 아낀다고 보일러를 꺼놓고 오전 오후 두 시간씩만 가동시키는 부모님 댁에 난방비 보조금을 드릴 수 있으니, 나는 부자다.

지난 12월에 쟁여놓았던 대봉시를 다 먹고 오늘 마지막 한 개가 남았었다. 아무 고민도 하지 않고 식구들 없는 데서 나 혼자만 맛있게 먹었다. 나 혼자 먹는데 괜스레 눈물이 났다. 홍시가 너무 달아서 그런 건지, 내 지나온 삶의 시간들이 사르르 녹아내리고 있었다.


(2021년 1월 11일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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