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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잽 01화

#01. 복싱을 시작하게 된 이유

by 파라미터


복싱은 부드러운 운동입니다.

복싱을 할지말지 망설이는 내게 관장님이 건넨 말이었다. "부드러운" 이라는 말에 두려움의 강도가 조금 낮아졌다. 결심이 섰다. ‘우선 한 달 정도 체험해 보자.' 그렇게 복싱을 시작한 날은 암 수술한 지 딱 1년 반이 되는 날이었다.


그러니까, 암이었다.

암은 불쑥 찾아온 것 같지만, 그저 불쑥 알았을 뿐이다. 이미 몸이 안 좋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힘은 없지만 몸이 무거워서 한없이 가라앉는 기분. 생각은 텅 비는데 머릿속은 꽉 찬 불쾌함.


그래서 ‘암’이라고 진단을 받았을 때는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건강이 안 좋은 이유를 알았고, ‘수술’이라는 해결 방법도 알았으니 그대로 따르기만 하면 됐다.


슬프지도 우울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암은 오래전에 발병된 것으로 추정됐지만 다른 장기로 전이되지 않았다. 수술을 준비하면서 심장의 문제까지 파악했다.


내 심장은 너무 느리고 약하게 뛰었다.

언제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 그러니까 지독한 질병의 발견은 매우 다행이었다. 문제를 문제라 깨닫지 못하는 것이 더 문제였으니까.


다행히 수술은 잘 끝났다.

하지만 심장이 문제였다. 열정과 의욕을 잃은 무기력한 심장, 그 흐리멍덩한 부정맥은 호전되지 않았다. 시술은 미루고 싶었다. 복용과 동시에 주치의의 조언대로 심장 기능을 강화할 수 있는 운동이 시급했다. 그랬지만...


운동은 끝내주게 귀찮았고 그래서 안일했다. 억지로 가끔 달렸지만 느슨했고 꾸준하지 못했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뜬 채 한참을 누워있었다.

일어날 수 없었다. 몸에서 내가 사라진 기분. 자연스레 맥을 찾았다. 집중해야 느낄 수 있는 희미한 맥은 너무 느리게 뛰었다. 내 머릿속에 떠올랐던 생각, 사실, 추측, 진실 등 그 모든 것을 포괄적으로 요약할 수 있는 단어는 하나뿐이었다.

소멸

내가 ‘암 진단’을 받았을 때도, <사전연명의료의향서>를 등록했을 때도 ‘소멸’이라는 단어는 ‘삶의 범주’에 없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뜨고 바닥을 지탱할 힘이 거의 없다는 것을 알았을 때 삶을 지탱하던 힘도 곧 사라질 것 같은 위기를 느꼈다.


‘이러다 소멸할지도. 그래도 건강하게 소멸하고 싶다.’

그걸로 끝.

'운동해야지'라며 분위기만 잔뜩 풍겼지 실천은 소극적이었다. 그때쯤, 가끔 나를 끌고 같이 달려주던 동생(나의 글에 그림을 그려주는 nedel)이 갑작스럽게 지방으로 이사하게 되었다.


언니 혼자 달릴 수 있어?”

"있겠냐?"

“어우, 그걸 왜 못 하냐. 그럼 이참에 복싱해 봐. 강추라니까.”

내가 그걸 어떻게 하냐? 몸치에, 뛰지도 못하고, 힘도 없고, 무섭고…….”

"핑계는 열심히네. 더 있어?"

있지. 내 나이에 어떻게 복싱을…….”

"최후의 변명이 나이 탓?"

"현실적으로."

"운동하는데 나이가 무슨 상관이냐! 현실적으로 지금이라도 해야지. 그냥 그렇게 살다 심장 멈추면?"
"죽겠지……."

"하---"


동생은 침착하게 다시 권유했다.

“한 달만 해봐. 혹시 아냐, 언니랑 잘 맞을지.”

“어.”

그리고 묵혔다.


결국 움직이게 되는 '때'는 확실히 존재하는 것 같다.

‘복싱’이 귀에 박힌 날부터, 평소에는 잘 보이지도 않던 복싱체육관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고, 드디어 ‘前 세계 챔피언’ 이라는 문구가 뇌리에 딱 꽂혔다. 강렬한 호기심을 무시할 수 없었다.


마침내 그곳을 찾았다.

그것도 세 번의 염탐 끝에 네 번째에 말이다. 살아가는 것은 끊임없이 문제를 해결해 가는 과정이다. 내 삶 속에 그 '부드러운 운동, 복싱'이라는 새로운 방법으로 문제해결을 시도해 보기로 했다.


그렇게.

마흔 끝자락에 필연과 우연으로 시작한 복싱은 운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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