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체력 후기술
관장님은 복싱체육관에 적힌 '선체력 후기술'을 가리키며 매가리 없는 내게 말했다.
“저기 글귀처럼 체력을 키우는 게 우선입니다.”
“쉽지 않을 것 같은데요…….”
“하면 됩니다!”
‘과연’이라는 의심이 가득했다. 나는 나를 믿지 못했다.
복싱을 배우던 초반, 나는 질병과 소멸 직전의 체력 보유에 자신감,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이유는…….
글을 쓸 때 ‘죽음’과 관련된 이야기를 자주 떠올렸다.
‘죽음’이나 ‘사후 세계’를 상상하며 인물들의 서사를 그렸다. 물론 그건 내 글 속 인물들의 이야기지만, 어쩌면 나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했다. 그래서 문득 ‘지금 내가 죽게 된다면?’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다. 질문에 대한 답은 좀처럼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다. 그냥 두루뭉술하게 “지금 죽어도 괜찮아” 정도.
진심인 줄 알았다.
수술을 받고 나니 마음이 달라졌다. 시간과 돈을 들이고, 고통까지 감내했는데 그냥 죽어버리면 너무 허무하고 억울할 것 같았다. ‘허무’와 ‘억울’ 하지 않을 방법을 찾기 위해 잠시 시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지금 죽어도 괜찮지” 않은 내가 내린 결론은, 쉬자! 회복을 핑계 삼아서 아주 편안히, 당당히 그리고 열심히 쉬어 보기로. (그때는 ‘복싱’을 염두에 두고 있지도 않았을 때였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쉬겠다고 작정했더니 멈춰 있던 각색 기획이 다시 진행됐고, 버려졌던 장편 소설이 채택됐다. 운명을 관장하는 신이 있기는 한 걸까? 그렇다면 내게 선심 쓰듯,
이번은 살려는 드릴게. 네 장기 일부를 주었으니, 옛다 일이나 받아라.
그 달콤한 제안을 받는 순간, ‘쉬자’는 어느새 ‘글 쓰자’로 변했다. 당시 선택에 후회는 없다. 다시 돌아가 선택한다고 해도, 나의 결정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쉼'을 미뤄야 하는 현실이 조금 아쉬웠지만, 어떻게 온 기회인데, 무조건 잡아야지!
감사했다… 라고 말하고 싶지만, 솔직한 심정은 절반의 감사와 절반의 원망. 하필 쉬겠다고 작정한 이때, 비실거리는 이 몸과 이 머리로 글을 쓰라니. 설마 글 쓰다 죽으라는 뜻은 아니겠지?
내 운명의 깊은 뜻을 온전히 받아들이고 드넓은 마음으로 무조건으로 “땡큐, 감사!”만 외칠 수 있었다면, 나는 애쓰며 글을 쓰지 않았을 것 같다. 어느 고요한 산방에 홀로 들어가…….
그러지 못했으니, 그렇게 살아나, 죽을 듯 글을 썼다.
‘훅’을 ‘잽’으로 겨우겨우 막아내는 기분은 비참했다. 버티며 힘들게 쓴 글은 부끄러웠고 화나서 견딜 수 없었다. 밑도 끝도 없는 불안에 잠 못 이루는 날이 늘어갔고 자존감과 자신감 모두 제로의 지리멸렬한 상태였다. 체력이 바닥인 것은 당연지사.
그런 상태에서 복싱은 시작되었다.
애초에 모든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줄넘기부터 난관이었다. 수십 년 만에 잡아본 줄넘기를 넘을 때마다, 전기가 정수리를 파고드는 것 같은 극심한 두통에 심장도 요동쳤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줄넘기 줄이 ‘목숨줄’이건, ‘동아줄’이건, 뭐든 간에 줄을 놓고 싶었다. 줄넘기가 이 정도라면 복싱은 얼마나 힘들겠어.
내 마음에서 포기의 낌새가 스멀스멀 올라올 때, 관장님께 요청했다.
“저 포기하시면 안 돼요.”
나의 <질병의 역사>와 <운동 포기 역사>를 미리 파악했던 관장님은 확실히 답했다.
포기 안 합니다. 믿고 따라오면 생존합니다.
조력자가 적대자인 ‘나’보다 더 강해 보이는 것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매일 체육관을 나갔다. 일주일 만에 발끝에서 정수리로 치솟던 두통이 사라졌고, 관장님은 ‘2단 뛰기’를 시도해 보라고 권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제 평생 2단 뛰기는 해 본 적이 없어요.”
그렇게 따지면 ‘복싱’은 해본 적이 있어?
없지.
2단 뛰기 고수들을 눈치껏 살피며 줄을 잡고 시도했다. 가볍고 빠르게 날아올라 ‘쿵’ 하고 무겁게 바닥을 밟기만 연속. 역시 실패는 자신 있고 성공은 무리였나 싶을 때, 드디어 하나 성공 이어서 세 개로 상승!
나도 모르게 “와!”하고 나만의 기쁨을 내뱉던 순간, 몇몇 초등학생 회원들이 무심히 지켜보고 있다가 조용히 ‘짝짝짝’ 박수친다.
얘들아, 니들한테 별것 아니겠지만 나 혼자 레벨업한 기분이거든!
그래서 부끄럽지만 박수는 감사히 받고,
오늘도 생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