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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잽 03화

#03. 내 손 안의 Inner Peace!

by 파라미터

운동 전에 준비해야 할 것 중 하나. 손과 손목을 보호하는 핸드랩이다. 복싱장에 가서야 그 핸드랩을 잊고 온 사실을 안다. 관장님에게 요청했더니 관장님은 붕대형이 아닌 장갑형 핸드랩을 건넨다.

“익숙해지면 안 됩니다. 편하지만 이건 가끔.”


당연히 장갑형 핸드랩은 ‘가끔’이다. 난 붕대로 된 핸드랩을 선호한다. 그 ‘핸드랩’ 만으로도 깨닫는 것들이 생긴다.


처음 ‘롤러를 이용해 핸드랩을 정리하는 법’을 실습했을 때 ‘멘붕’이 찾아왔다. 핸드랩 정리가 어려웠냐고? 아니다.

1. 붕대 끝을 롤러 사이 좁은 틈에 넣고 롤러를 부드럽게 돌린다.

2. 복싱 붕대는 나무 나이테처럼 겹겹이 쌓이면서 쉽고 빠르게 정리된다.

참 단순하고 쉽다.


문제는 나의 시력. 내 눈에는 핸드랩 끝이 들어갈 롤러의 좁은 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이긴 보였다. 다만, 그 틈으로 핸드랩 끝을 한 번에 자연스럽게 쓱 넣을 수 없었다.


동체시력 따위는 바라지도 않는다, 보이기나 잘 보이던가…….


‘노화’로 인한 ‘노안’, 그 현실을 자각한 시간이었다. 어렵지 않은 간단한 행동을 할 때, ‘노화’는 더 쉽게 인지되는 것 같다.


복싱체육관에서 루틴은 단조롭지만 빡세다. 준비운동, 러닝머신, 줄넘기, 연습, 마무리 운동을 순차적으로 하다 보면 온몸은 땀범벅이 되고 시간도 훌쩍 지난다.


그렇다고 나의 성장이 ‘땀’과 ‘노력’에 비례하지는 않는다. 애초에 나는 ‘성장이 느린 사람’이다. 거기에 ‘노화’가 촉진제로 달라붙어서 ‘성장이 한없이 느린 사람’이 되었다.


복싱하는 이유 중 하나도, 젊어지기 위해서가 아니라 ‘지금 건강한’ 삶을 위해 ‘나’를 단련시키는 것이니까, ‘노화’를 부정하지 말자, 라며 현실을 인정하는 척하지만 속은 쿨하지 않다. 당연히 젊어지고 싶지!


운동할 때는 물론 글을 읽고 쓸 때도 서서히 진행되는 '노화'를 빠르게 체감한다. 흰머리는 유난히 잘 보이는데 글씨는 잘 보이지 않고, 몸은 더 똥똥해지는데 머리는 통통 굴러가지 않는다. 가끔 지인에게 이런 속상한 마음을 투덜거린다.


"뇌가 젊어질 것 같지 않아. 젊은이들처럼 번뜩이는 기발함이 없어."

"깊이가 있지 않겠어?"

"깊이는 개뿔. 번뜩이는 기발함에 깊이까지 있는 자들이 얼마나 많겠어."

"그렇지."

"그리고 난 깊이도 없잖아. 그냥 단어나 제대로 떠올랐으면."

"글 쓰기 힘들겠네?"

"어…퇴사를 더 일찍 해서 글을 써야 했을까."

"회사 다니면서 글을 썼어야 했던 게 아닐까."

"흠--무명에서 벗어나기 힘들겠지?"

"음 ………… 아니--."

"이런, (…)쩜쩜쩜이 너무 많잖아!"

"아 …………… 미안."

"(TT)나 좀 망한 거 같지?"

"힘내."

"……어 ……"

"힘내서 복싱도 하고."

"어 …… 힘내서 복싱……"


다시 핸드랩으로 돌아가서. 핸드랩을 정리하기 위해 쉬운 '롤러' 가 아닌 내 노동과 시간을 투자하기로 했다. 운동 후 깨끗하게 세탁해서 바짝 말린 후, 내 손으로 핸드랩을 정리하는 것이다.


길게 펼친 핸드랩을 둥글게 만다. 긴 붕대를 둥글게 마는 단순한 행동을 반복하다 보면 마음이 편안해진다. ‘노화를 인정하고 불안을 인지하고 세상의 돌고 도는 이치를 생각하고……’ 이런 생각도 고(苦)가 되기도 하니 잠시 내려놓는다.


그렇게 애초 ‘노화’로 시작된 인식이 어느덧 ‘고요’로 잠잠해질 때, 평온해진다.


내 손 안의 짧은 평온이 지속될 수 있도록. 오늘도 핸드랩을 감은 주먹으로 땀을 흘린다.

힘내서 복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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