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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잽 16화

#16. 게으른 날도 있다

by 파라미터

컨디션이 늘 괜찮을 수는 없다. 특히, 잠을 잘 못 이룬 날은 더 그렇다. 만약 비까지 내린다면 몸은 더 축축 처진다. 복싱 가방을 챙기면서 조금 고민하다가 나간다. 집에 있어 봐야 늘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날, 운동도 축축 늘어진다.


호흡도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숨을 입 밖으로 내쉬며 자세를 잡고 힘을 조절하는 것이 쉽지 않다. 관장님은 계속 “호흡합니다! 그래야 심장도 더 활발하게 움직입니다.”라고 코치하는데 숨을 내쉴수록 기운은 더 빠진다. 그래도 쉴 수 있는 만큼 숨을 후후 내쉬며 연습한다.


전에 호흡이 잘되지 않을 때, 자꾸 ‘호흡’을 강조하는 관장님에게 질문한 적이 있다.

“관장님, 숨을 내쉬지 않으면 어떻게 되나요?”

빠른 잽처럼 빠르게 날아온 관장님의 대답은,

죽습니다!


순간, 웃음이 터지면서 뱉지 못했던 호흡을 뱉어냈다. 복싱하면서 호흡을 입으로 뱉어내는 것은 어째 익숙해지지 않는다. 내공이 덜 쌓였나 보다. 당연한 소리다.


호흡도 그렇지만 동작도 굼뜨다. 괜히 잠 핑계, 날씨 핑계 등을 대 보지만 소용없다. 관장님은 ‘힘을 빼고 더 빠르게’를 요구하지만, 안 될 때는 정말 안 된다. 힘이 거의 다 빠져서 스피드가 느려지던 때, 관장님에게 묻는다.

“슬로우 복싱은 없어요?”

황당한 표정을 짓는 관장님의 대답은,

“있으면 나도 배워보고 싶습니다!”


잘 안 되는 날은 운동을 억지로 오래 붙들고 있지 않는다. 연습을 조금 줄인다. 마무리 운동 중 하나로 하던 에어바이크를 빼먹고 운동화부터 벗어 정리한다. 관장님이 왜 마무리 운동을 다 하지 않느냐고 묻는다. 나는 쭈뼛거리며 에어바이크는 힘들어서 타기 싫다고 말한다. 관장님의 대답은 단호하다.

세상에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어떻게 삽니까!


아, 맞는 말이긴 하다. 그래도 소심하게,

“운동화도 이미 정리했고.”

“신발은 다시 신으면 됩니다!”

반박불가. 나는 다시 운동화를 신는다.


평소 관장님의 눈에 내가 너무 무리를 한다 싶으면 적절히 운동을 멈추게 하는데, 게으름을 피울 때는 확실히 잡아준다. ‘게으름’이나 ‘딴생각’이 관장님에게 들킬 때마다 뜨끔해진다. 그러니 열심히 할 수밖에. 다시,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하기로 한 운동은 하고 가자.


전에 관장님은 집에서는 운동이 마음먹은 대로 잘 안된다는 내게 말한 적이 있었다.

“집에서 운동할 생각 말고, 복싱장 나와서 잔소리 들으면서 하세요.”

그렇게 말했지만, 잔소리는 거의 하지 않는다. 그저 지켜보며 적절한 충고와 조언을 툭, 때로는 부드럽게 또는 기운차게 던질 뿐이다.


조언을 들은 후부터는 내 몫이다. 조언을 어떻게 받아들여 얼마나 체화시키느냐의 문제.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도록 정신을 차리고 움직여야 하는데……. 그냥 찌뿌둥한 컨디션에 게을러지는 날이다. 그런 날도 있는 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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