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마음속에 화산 하나쯤 품고 사는 것 같다. 잠잠히 쉬고 있기도 하고 열정으로 쏟아지기도 하다가 병이나 분노로 폭발할 수도 있는 그런 화산. 나도 그런 화산 하나쯤 품고 있었다. 그리고 폭발의 시기가 도래했으니. 그 시기가 바로 갱. 년. 기.
내게도 예외 없이 (전에도 가볍게 언급했던) 갱년기가 왔다. 인정하기 싫지만, 인정하기 싫어도 그냥 막무가내로 들이대는 무시무시한 갱년기였다. 얼마나 무시무시하냐면 등판에서 열이 날 때면 달걀은 완숙 프라이로, 밥은 등판 볶음밥으로도 조리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남편은 처음에 이해를 못 했다. 그러다가 내가 열이 오를 때, 내 등을 만져보고 “왜 이렇게 (따뜻도 아닌) 뜨거워.”라며 깜짝 놀랐다. 그러니까, 그것은 갱년기 증상이었고, 난 ‘열정’이 희미하게 남았던 사람에서 ‘열’만 나는 사람이 됐다. 만약 계속 그런 ‘열’ 상태가 지속됐다면 살 수 없었을 것이다.
‘열’이 오를 때는 대체로 뭔가 골똘히 생각할 때로, 내 의지대로 되지 않던 프로젝트를 떠올리기만 하면 등에서 열이 솟구쳤다. 나 자신도 그런 현상이 신기해서 일부러 '열' 뿜기를 시도해 본 적이 있었다. 평온하게 있다가도 시원찮은 프로젝트를 떠올리면 머리에서 열이 나는 대신 정확히 등 한가운데가 찜질방처럼 데워졌고 땀이 마그마처럼 분출하기도 했다. 그런 때는 알 수 없는 짜증과 분노로 진짜 ‘갱(gang)’이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타오르는 열이 빛나는 후광인 광배(光背) 같은 것이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만, 그것은 어림없는 상상이었다. 그래도 억지로 긍정적으로 ‘갱년기 능력’이라고 꾸며 생각하고(엑스맨 유니버스에 들어갈 만한 능력치의 새발의 피도 안되지만) 영화 ‘에브리씽 에브리웨어 올 앳 원스’의 에블린 같은 중노년의 히어로물이라도 써봐야 하는 것 아니냐며 책상에 앉았다. 문제는 몸에서 ‘열’이 날 때는 생각도 멈춘다는 것이다.
이 짧고도 긴 TMI를 하는 이유가, 이제 ‘복싱’의 효과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등에서 타오르는 열이 분출되는 증상이 복싱하면서 나아졌다. 우연히 복싱 시작 시기와 맞물려 갱년기 증상이 호전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빠르게 호전이 되는 증세라면 ‘갱년기’의 ‘열’을 겪는 모두가 그렇게 힘들게 보내지는 않을 것이다.
복싱은 내 안의 열을 밖으로 발산하게 도와줬다. 복싱장에서 내가 견딜 수 있을 만큼 에너지를 발산시키며 땀을 쑥 뺐다. 내 평생 흘린 땀을 다 합쳐도 복싱하면서 흘린 땀의 10% 아니 5%로 안 될 것 같다. 복싱 전에 타올랐던 뜨거웠던 등은 서서히 진정됐다.
물론 복싱이 무슨 만병통치약처럼 증상을 100% 없애주지는 않는다. 아주 가끔 열감이 뿜어져 나오기는 했다. 하지만 전에 비해 횟수도 엄청나게 줄었고 강도도 매우 약해졌다. 그리고 열감이 올라와도 풀 방법 ‘복싱’이라는 믿는 구석이 있으니까 그리 당황스럽지 않게 됐다.
내게 질문해 봤다. 갱년기가 와서 슬프냐고. 솔직하게 슬프다(두려움에 가깝다). 하지만 그 슬픈 감정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 슬픔도 화산 속에 녹아서 복싱을 통해 분출된다. 아무 생각하지 말고 단순하게 땀을 내자며 쉬지 않고 움직인다. 땀이 식고 열이 식고 갱년기 증상도 진정된다.
그리고 관장님의 조언처럼 하체 운동을 더 열심히 한다. 노화가 진행될수록 다리에 힘이 빠지면 힘들다고. 난 또 인정한다. 복싱으로 박살 내는 갱년기에 바닥을 단단히 딛고 설 수 있는 힘, 흔들림을 이겨내며 세상을 살아갈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