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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잽 17화

#17. 수정 지옥

by 파라미터

여전히 복싱 초보자이긴 해도 처음 시작할 때보다 얼마나 늘었는지 궁금해질 때가 있다. 그러면 가끔 관장님에게 내 실력이 얼마나 향상됐는지 묻곤 한다. 그럴 때마다 관장님은 나의 예상 성적보다 후한 점수를 준다.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 한다’고 하니까 일부러 그러시나 싶어 관장님의 진의를 의심한다. 관장님은 진심으로 하는 말이라고 반박한다.

“옛날 동영상을 다시 봐 보세요. 지금 얼마나 많이 늘었나.”


다시 보고 싶지는 않은 나의 왕초보시절의 동영상. 그 촬영 영상을 보면서 잘못된 나의 자세를 확인하고 교정 포인트를 잡았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늘 자세를 교정하고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 잡아가고 있다.


아직은 초보자로서 복싱을 그리 잘 안다고 할 수 없지만, 관장님이 코치하는 수정 포인트는 ‘기본의 기본’ 같다. 기본자세, 스텝, 각도와 스피드, 그리고 호흡 등 기본을 중심으로 잘못된 점을 고쳐가면서 잘 안 되는 동작을 반복 연습하고 보완한다. (특히, 어퍼컷은 왜 그리 엉성한지……)


솔직히 수정은 힘들다. 대부분 힘들다. 기존 익숙해진 것들을 고치는 것보다 아예 처음부터 시작하는 것이 나을 때도 있다. 그래도 고치면 나아진다.


글도 마찬가지다. 기본이 중요하다. 주제는 흔들리지 않아야 하고 매력적인 주인공은 가치 변화를 겪으면서 어쩌고 저쩌고 등. 그렇게 잡고 썼는데도, 나의 초고는 늘 엉성하다. ‘초고는 쓰레기’라고 했는데, 고쳐도 고쳐도 쓰레기 같을 때도 많고 ‘수정 지옥’에 빠져서 허우적거릴 때도 많다. 어떤 내용은 좋지만 버려야 할 때도 있고, 어떤 내용은 무난하지만 살려야 하는 때도 있고.


그렇게 수정버전들이 쌓여간다. 그러다 어쩔 때는 처음 버전으로 돌아가서 다시 각잡고 처음부터 새롭게수정, 그런 게 '수정 지옥'이다. 그래도 확실한 것은 수정하면 나아진다. 나아졌다고 해서 그 글이 최고가 되거나, 잘 팔려서 빵 뜨거나 그런 것은 아니다. 어쨌든, ‘수정을 하면 할수록 나아진다는 것’이 포인트다.


다만 글은 복싱과 달리 수정이 어려우면 묵혀둔다. 묵혀뒀다가 어느 날 꺼내보면 그 글이 진짜 수정의 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어느 부분만 살릴지 알 수 있다. 진짜 부끄러운 쓰레기라면 버리고 다른 글을 쓰는 것이 낫다. ‘긍정적 포기’다. 물론 항상 그런 것만은 아니다. 포기하지 못해서 마냥 붙들고 놓지 못하기도 하고, 때로는 급하게 서둘러 쓰는 경우도 많다. 성급하게 쓴 글의 결과는 영 시원찮다.


복싱도 마찬가지다. 느린 내가 복싱할 때는 성급해진다. 스피드가 빨라야 하는데 그저 성급하게 움직인다. 서두를 것도 없는데 조급하게. 그렇게 되면 펀치의 적중률이 현저하게 낮아진다. 실속 없이 몸만 쉼 없이 움직인 꼴이 된다. 뭔가 하기는 했는데, 결과는 영 시원찮다. 그러면? 다시 자세를 수정하며 연습하는 수밖에.


복싱이든 글이든 삶에서 수정은 필수다. 다만, 수정의 포인트를 잘 잡아내기 위해서 ‘안목’이 필요한 것 같다. 결국, ‘안목’을 키워야 하는데, 그러려면 또 숱한 수정의 과정을 거치면서 관장님이나 코치님처럼 전문가가 되거나 조언을 받아야 하고……. 이래서 ‘수정 지옥’을 벗어나기 힘든 거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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