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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잽 19화

#19. 거리, 방향, 타이밍 그리고 그냥 잘!(1)

by 파라미터

핸드랩을 두껍게 말고 글러브에 손을 쑥 넣는다. 두툼한 손목 벨크로도 단단히 두르고 글러브 낀 양손을 힘차게 꾹꾹 누른다. 관장님이 한마디 한다.

"오늘은 링 위에서 할 겁니다. 이따가 링 위에서 어떻게 할지 고민해 보세요."


관장님이 다른 회원을 지도하는 사이, 나는 샌드백 연습을 시작한다. 동시에 잠시 후 링 위에 올라 관장님을 어떻게 공격할지 고민한다. 딱히 쓸만한 고민이 아니었다는 게 금방 들통난다.


나의 주먹은 거리감을 상실해 관장님 앞에서 헛손질을 연거푸 한다. 적당한 거리를 찾기 위해 움직이는 것만 해도 바쁜데 공격과 방어 타이밍 생각은 어림도 없다. 아니 생각 자체가 소용없다. 본능적으로 나와야 하는 동작들인데 그렇게 되지 않는다.


여기에 내가 간과한 것이 있었는데, 움직임의 방향이다. 나는 관장님이 움직이는 방향과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며 상대에게 공간을 아주 넓게 허용하고 있었다. 관장님이 지도로 다시 방향을 잡고, 거리를 유지하며, 타이밍을 잡고…워-ㄴ-ㅌ-ㅜ


3분씩 2라운드를 쉬지 않고 링 위를 헤집고 다녔더니 다리가 연체동물이 된 것처럼 흐물거린다. 웃음이 난다. 기분이 상쾌하다. 너무 힘든데, 신난 이 기분은 뭐지?


내가 여전히 복싱 초보라는 사실을 각성하게 하는 연습이다. 하지만 복싱을 더 생각하게 한다. 더 많은 경험을 하면 복싱에 대한 더 다양한 정의가 떠오르겠지만, 지금까지 내가 느낀 복싱은 단순한 격투기가 아니라 거리, 방향, 타이밍 모든 것이 조화를 이뤄야 하는 운동인 것 같다. (그런 운동이 많겠지만.)


방향을 잘 잡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상대를 정확히 타격해야 한다. 상대와의 거리가 너무 멀면 주먹이 닿지 않는다. 대신 움직임이나 위치는 잘 보인다. 반대로 너무 가까우면 팔을 제대로 뻗을 수 없고, 주먹에 가속도도 붙지 않는다. 결국, 적절한 거리를 확보한 상태에서 빠르게 움직이며 상대를 타격해야 한다. 중요한 건, 내가 상대를 칠 수 있는 거리라면, 그만큼 나도 공격당할 수 있는 거리 안에 있다는 사실이다.


다음은 타이밍이다. 공격의 타이밍을 놓치면 기회를 잃고, 방어의 타이밍이 늦으면 그대로 맞는다. 반 박자만 늦어도 정타로 얻어맞고, 반 박자 빠르면 헛스윙으로 중심을 잃는다. 그래서 자세를 빠르게 재정비하고, 상대의 움직임을 예의주시하며 기회를 노린다.


사는 것도 복싱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속한 사회, 그 안에서 맺는 관계에 따라 다양한 거리를 유지하고, 나의 목표에 맞는 방향을 따라가며 기회를 잡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비슷한 것 같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도.


인생은 그 자리에서만 움직이는 샌드백이 아니다. 링 위에서 주먹을 올리고 나를 노려보며 움직이는 상대처럼 인생도 늘 끊임없이 움직이며 변화한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거리, 정한 방향, 찾은 타이밍이 그대로 유지되는 경우가 드물다. 거리를 가늠하다가 관계의 진심과 의미를 놓치기도 하고, 기회를 놓치지 않으려고 무리하다가 오히려 자신을 무너뜨리기도 하고, 방향을 잃고 이리저리 방황도 한다.


인생은 연습이 없다는 점에서 복싱보다 어렵다. 그렇지만 ‘인생이 그저 복싱보다 조금 어려운 정도’ 라고 생각하니까, 충분히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도 붙는다. 그 힘든 복싱보다 내가 배우고, 선택하고, 수정할 수 있는 관계, 방향, 기회도 더 많으니까 말이다.


틈나면 궁금한 것을 질문하는 내가 관장님에게 묻는다.

“같은 체급인데 한쪽이 키가 더 크면, 리치가 짧은 쪽이 불리하지 않나요?”

”불리해 보이지만, 안으로 파고들면서 기회를 잡아야죠."

”그럼, 리치 차이는 없는데 체중이 차이 나도 붙을 수 있나요?"

“보통 격투기는 체중을 기준으로 체급을 나눠, 체급끼리 붙기는 합니다만.”

“그래도 만약 붙는다면 누가 이길까요? 체중이 많이 나가는 사람이 이길까요?”

“훗, 아닙니다, 그냥 잘하는 사람이 이깁니다.”


모든 조건이 아무리 좋아도, 결국 중요한 건 '그때, 그 상황에서 얼마나 잘하느냐'이다. 그러니까 ‘그냥 잘하는 사람’이 이긴다. 나도 내 일에서 ‘그냥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 욕심이고, 희망이다. 쉽지 않다. 그렇더라도, 그냥 복싱보다 조금 더 어려운 미션쯤으로 생각하면 또 못 할 것도 아니다.


하지만 '잘하는 사람'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그냥 힘들어도 웃음이 나는 복싱처럼 그렇게 살다 보면 뭐라도 되어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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