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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런치북 나의 잽 20화

#20. 복싱이 가르쳐 준 태도, 그냥 잘!(2)

by 파라미터

미트 연습을 마치고 관장님이 미트 박수를 ‘짝짝’ 친다.

“잘했습니다. 오늘 정말 빡세게 했는데, 힘들어 보이지 않습니다.”

조금 힘들긴 했는데, 진짜 빡세게 한 건가 싶을 때, 관장님이 말을 잇는다.

“아주 뿌듯합니다. 가르친 보람이 있습니다.”

체력 향상 인정이다.

“감사합니다!”

“이 동네 또래 중 1등.”

과장이지만 나아졌다는 농담 섞인 칭찬에 기분이 좋아진다. 하지만 아직 매우 부족한 것을 알기에 민망하기도 하다. 그래서 대꾸한다.

이 동네서 제 나이대 여자는 저 혼자일 것 같은데요?”

“그렇다 해도 어쨌든 1등 아닙니까. 내가 제일 잘한다! 그렇게 생각하고 하십쇼!”

자신감을 꾹꾹 챙겨주는 관장님의 말에 빼지 않고 짧지만 자신 있게 대답한다.

“네!”


복싱을 배우면서 달라진 점은 체력만이 아니다. 복싱장에서 나의 ‘말’ 곧, 태도다.

복싱 초반에 내가 가장 많이 했던 말들은 “못 할 것 같은데요. 못 해요.”, “그게 될까요?”, “안 돼요.”, “힘들어요.” 등과 같이 자신감 없고 부정적인 자세를 표현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에 대응하는 관장님의 말들은 “할 수 있습니다.”, “됩니다.”, “되잖아요.”, “뿌듯합니다.”, “보람됩니다.” 등이었다. 물론 지도자로서 용기를 주기 위해 건네는 당연하고도 보편적인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말’ 아닌 경험이 축적된 지도자로서의 태도였다.


그러면 나의 말속에 담겼던 태도는? 자신감 없고 노력도 해 보지 않고 부정적인 말부터 내뱉던 소극적인 태도. 그것은 ‘불안’과 ‘두려움’에서 기인한 것이었고 그런 태도가 부정적인 언어로 표출되었다. 그래서 복싱을 끝내고 귀가할 때마다 무엇이 나를 그토록 불안과 두려움에 떨게 하는지 생각하곤 했다.


결론은 단순했다. 욕망이었다. 욕망이 족쇄가 됐다.

처음부터 잘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성급히 잘하고 싶다는 마음. 목표를 꼭 이루고 싶다는 강한 성취 욕구. 그런 막연한 욕망들이 ‘불안’과 ‘두려움’을 만든 것 같다. 낯설고 서먹한 운동, 내 의지와 반대로 움직이는 몸, 나아지지 않던 내 실력 등이 키우던 것은 복싱에 대한 두려움과 시간이 흘러도 실력이 제자리일 것만 같은 아직 발생하지 않은 시간에 대한 불안. 그럴수록 더 담대하고 긍정적인 태도를 보여야 했지만, 오히려 부정적이고 방어적인 말들이 나왔다. 특히 욕망과 현실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게 느껴질 때는 더더욱.


그럼에도 불구하고 목표를 이루고 싶다는 '욕망'때문에 두렵고 불안해도 멈추지 않을 수 있었다. 대신 '잘하겠다'는 욕심은 많이 내려놓고 원래 운동을 시작하려던 초기의 목표 '체력 키우기'에 더 신경 썼다. 느리지만 조금씩 체력이 나아지는 것이 눈에 보이면서 나의 말은 "네." "해볼게요." "다시 보여주세요." 등으로 변했다. 잽 하나에도 힘들어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던 내가 뚝뚝 떨어지는 땀에 괜히 기분이 좋아져서 열심히 할 정도로 태도도 변했다.


태도가 변하니 두려움과 불안을 인정하거나 극복하며 운동하고, 노력하니 체력은 더 좋아지고, 체력에 맞춰 목표도 다시 생기고 다시 노력하는 긍정적 순환이 돌고 도는 선순환 효과를 경험했다. 그래서 체력이 훨씬 나아진 지금, 복싱을 잘하고 싶다는 목표를 다시 슬쩍 밀어 본다. 욕망이 커지면 두려움과 불안도 커지겠지만 , 뭐든 한 가지는 잘할 수 있겠다는 뇌피셜까지 작동시켜 본다.


얼마 전, 이제 세 살 된 조카가 내게 ‘원뚜’를 같이 하자며 쿠션 앞에 앉았다. 처음에는 ‘뭐지?’ 했는데, 작고 귀여운 손을 주먹 쥐고 쿠션을 향해 “원뚜, 원뚜, 원뚜.”하며 나의 복싱 동영상을 따라 하는 것이었다. 귀엽고 낭랑한 목소리에 앙증맞은 주먹은 어찌나 밝고 에너지 넘치던지. 마지막 주먹에 경쾌하게 “원뚜--”하고 호흡을 뱉은 조카가 기세 좋게 한마디 외쳤다.

내가 쩰 잘해!


누가 가르쳐주지 않았는데도 어린 조카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 어떤 욕망도 품지 않고 순수 그 자체로 오롯이 자신에게 집중한 것이었다. 자만심이 아닌 자신감으로 하면 된다는 것을 조카도 내게 보여줬다.


"잽만 날리다 죽을래?" 라며 잽밖에 못할까 봐 두려움과 불안에 떨었다. 그러나 복싱에서든 삶에서든 잽밖에 할 수 있는 게 없다고 의기소침해지거나 징징거려서는 안 된다. 잽 하나만이라도 강력하고 정확하게 잘 날릴 수 있다면, 그래도 되는 것이 아닐까. 조금은 여유롭게, 근거를 가진 자신감으로 하나씩 해 나간다. 그리고 내가 당당하게 이룬 작은 성취에 즐거움을 느낀다. 그 감정이 곧 긍정적인 태도다. 그것이 복싱이 내게 제대로 던진 Hook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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