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관장님에게 질문을 던질 때는 가르침대로 자세가 나오지 않거나 내가 바라는 대로 운동이 잘되지 않았을 때다. 대체로 잠깐 숨을 고르는 30초 이내에 질문과 답변이 마무리된다. 질문은 대체로 자세와 관련된 것이지만, 복싱 초기에는 복싱에 대한 호기심으로 짬짬이 이것저것 묻곤 했다.
잽을 배울 때도 마찬가지였다. 잽을 날리는 손에 너무 힘을 주면 안 된다, 잽을 날리는 왼손(난 오른손잡이로서)은 오른손을 거들뿐, 잽을 날린 후 회수가 빨라야 하고… 그렇게 연습하면서 문득 궁금한 내용이 떠올랐다.
"관장님, 잽만으로도 상대를 이길 수 있나요?"
"잽만으로도 상대방을 눕힐 수 있습니다."
"오~~!"
"어떤 공격 기술을 주력으로 하고 싶은데요?"
"(뭘 많이 배웠어야 알지… 잽만으로도 가능하다면) 잽?"
"(흐-) 열심히 하세요."
가볍고 날렵하지만 그리 강력해 보이지 않는 잽만으로도 상대를 이길 수 있다는 사실이 신선했다. 이기기 위해서는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잽을 날려야 할 것 같았다. 그것도 한 곳만 공략해서. 상대의 공격을 잘 방어하는 것은 물론 포기하지 않는 끈기와 체력이 필요한 것도 당연해 보였다.
잽을 날리면서 하루, 하루가 ‘잽’의 연속이라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무난하게 흘러가는 일상이지만, 나와 ‘관계’된 모든 것들과 알게 모르게 잽 같은 공격을 주고받는다. 그 '잽’은 말일 수도 있고, 행동일 수도 있고, 눈에 보이지 않는 마음일 수도 있다. 잽을 너무 빠르게 회수해서, 타격감이 그리 심하지 않아서, 너무 익숙해져서 그게 ‘공격’인 줄도 모르고 지날 때가 많다. 사실 알아도 무시해 버린다.
시간이 흐르면서 가벼워 보였던 ‘잽’에 대한 생각도 변한다. 잽으로 받은 상처가 누적되어 커진 것을 알게 되거나 잽으로 꾸준히 한 곳만 집중하면서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을 때, 살아가면서 주고받았던 소소한 잽은 소소한 공격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꾸준한 ‘잽’의 위력이 아닐까 싶다.
그렇게 ‘잽’의 가능성을 가늠하고 있을 즈음에 ‘훅’이 등장했다.
기억(┓)을 기억합니다.
팔을 '┓'자로 만들고 하체에 힘을 싣는다. 상체에 힘을 싣지 않아도 원심력으로 훅, 빠르게 훅! 그리고 연타로 빠르게 훅, 훅. 이거 괜히 멋져 보인다. 아는 만큼 보인다더니 훅을 배우고 나니 잽은 그냥 너무 가벼운 잽일 뿐.
‘훅’은 기억이다. 훅의 자세도 기억이고, 훅으로 다가온 경험은 잊을 수 없다. 그것이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말이다. 나쁜 기억보다 좋은 기억을 남기고 싶은 마음이 보편적이지 않을까. 그러니 가끔 내게 들어오는 강한 공격을 통쾌하게 받아칠 수 있고, 내가 먼저 주도적인 공격으로 좋은 기회를 만들어 낼 수 있는 제대로 된 ‘훅’이 필요하다.
이런 ‘훅’을, 완벽하지는 않아도 예상보다 빠르게 익혔다. 난 ‘훅’ 체질인가,라는 말도 안 되는 자만심이 차오를 때, 지켜보던 관장님이 나의 자만심을 살짝 눌러준다.
"그동안 기본기 연습을 잘해서 그렇습니다."
"?"
"같은 동작만 반복하면 너무 지루해하는데, 지루하다고 하지 않고, 잘 따라오고 계십니다."
"당연히 지루하죠. 근데 저는 너무 못하니까… "
운동에 소질이 없던 난 그동안 진도를 빼는 것보다 조금 지루해도 자세와 잽 등 기본기를 잘 잡기 위해 꾸준히 연습했다. 내가 부족한 것을 알았기에 진도가 느려도 개의치 않고 안 되는 동작을 반복했다. 그것이 ‘훅’에 반영된 것일 뿐 ‘훅’을 유난히 빨리 익힌 것이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던졌던 끈질긴 ‘잽’은 ‘훅’으로 가기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었다.
‘잽’만 날리다 인생이 끝나기에는 조금 아쉬울 것 같고, 그렇다고 날마다 ‘훅’이면 너무 힘들 것 같다.
그래서 어쩌라고?
아직은 날마다 ‘잽’이다. 날마다 쌓인 ‘나의 잽’이 단단해질수록 기회가 찾아올 때 날리는 ‘훅’은 ‘멋진 훅’으로 기억되지 않을까 싶다.
잽이 이룬 멋진 기억을 기억하며 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