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아버지는 무섭고 완고한 분이었다. 교육열이 높은 집안의 장남이었던 아빠는 공부만 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 집안에서는 학업의 결과로만 인정받을 수 있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그날도 수학시험을 많이 틀렸다. 시험지 사인해오라는 데 집에 오는 길부터 가슴이 뛰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집에 도착하니 곧이어 아빠가 집으로 오셨다.
‘시험지 사인받아오라고 했는데 지금 보여드려야 하나? 아니면 이따 보여드릴까? 어차피 혼날 텐데…. 에라 모르겠다 지금 보여드리자!!’
나는 수학시험지를 손에 꼭 쥐고 쥐구멍에 들어가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빠…. 수학시험 봤는데 부모님 사인받아오라고 하셨어요.”
정적이 흐르고 아빠는 말없이 한참을 시험지를 쳐다보셨다.
“후유…”
“커서 뭐가 될는지….”
아빠의 깊은 한숨과 혼잣말에 주눅 들었다.
나는 늘 ‘인정’에 굶주렸다. 똑똑한 언니들 사이에서 완고한 아버지는 나를 인정해주지 않았다. 엄밀히 말하면 인정을 못 느꼈다는 게 정답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학업을 제외하고는 그 어떤 어려움도 느끼지 못했다.
놀이터에 나가면 나를 기다리는 친구들과 동생들이 가득했고 거기서의 대장 노릇은 기쁨을 주었다. 집 안에서는 앗싸, 밖에서는 늘 인싸였던 나는 특별한 행동을 하지 않아도 많은 친구가 따랐다. 그러나 놀이터에서 신나게 놀고 아빠가 계신 집으로 오면 급격히 말수가 줄었다.
어른이 되어가면서 이러한 ‘인정 욕구’로 인해 어려운 면들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늘 밖에 나가서 인정받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들이 버거웠다.
‘뭐가 될는지’란 혼잣말 대신 “너는 커서 뭐가 되고 싶니?”란 다정한 말이 늘 그리웠다.
요즘 큰아이가 기침감기가 잘 낫지 않았다. 옆에서 콜록콜록 기침 소리가 계속 나는데 학교에서도 그럴까 염려됐다.
“준이야. 오늘 학교 가서는 기침 너무 크게 하지 마. 옆 사람이 불편할 수 있으니까.”
“엄마. 제가 기침을 참는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에요. 자꾸만 목이 간지러워 기침이 자꾸만 나오는 걸 어떡해요. 제어가 안 되는걸….”
본인 생각을 정확히 표현하는 아이를 물끄러미 보고 있으면 어른들의 눈치 보느라 말 한마디 편하게 못했던 어린 내 모습이 떠올랐다.
아이를 키우는 엄마가 되어보니 학업만이 전부였던 환경에서 자란 아빠의 행복하지 않은 유년 시절이 헤아려졌다. 어떤 즐거움 없이 보내는 아빠의 마음도 참 힘들었겠다.
아이들을 키우면서 나의 기분이 침울해져서 혼낼 때면 그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됐다. 그때의 아빠도 어려운 현실이 힘드셨던 걸까?
창밖에 아이들이 등교한 모습을 보면서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빠 아까 그 한숨이요. 나한테 하는 거예요? 내가 한심했나요?’
아빠의 다정한 한마디가 그리워지는 날이다.